아버지와 나
신해철
PART 1
아주 오래전 내가 올려다본 그의 어깨는 까마득한 산처럼 높았다.
그는 젊고 정열이 있었고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나에게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내 키가 그보다 커진 것을 발견한 어느 날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그가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이 험한 세상에서 내가 살아나갈 길은 강자가 되는 것뿐이라고 그는 얘기했다.
난, 창공을 날으는 새처럼 살 거라고 생각했다.
내 두발로 대지를 박차고 날아올라
내 날개 밑으로 스치는 바람 사이로 세상을 보리라 맹세했다.
내 남자로서의 생의 시작은 내 턱 밑의 수염이 나면서가 아니라
내 야망이, 내 자유가 꿈틀거림을 느끼면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기 걸어가는 사람을 보라 나의 아버지, 혹은 당신의 아버지인가?
가족에게 소외받고, 돈벌어 오는 자의 비애와
거대한 짐승의 시체처럼 껍질만 남은 권위의 이름을 짊어지고 비틀거린다.
집안 어느 곳에서도 지금 그가 앉아 쉴 자리는 없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내와 다 커버린 자식을 앞에서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남은 방법이란 침묵뿐이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아직 수줍다.
그들은 다정하게 뺨을 부비며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를 흉보던 그 모든 일들을 이제 내가 하고 있다.
스폰지에 잉크가 스며들 듯 그의 모습을 닮아 가는 나를 보며,
이미 내가 어른들의 나이가 되었음을 느낀다.
그러나 처음 둥지를 떠나는 어린 새처럼
나는 아직도 모든 것이 두렵다.
언젠가 내가 가장이 된다는 것.
내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무섭다.
이제야 그 의미를 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그 두려움을 말해선 안된다는 것이 가장 무섭다.
이제 당신이 자유롭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나였음을 알 것 같다.
이제,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후에, 당신이 간 뒤에, 내 아들을 바라보게 될 쯤에야 이루어질까
오늘밤 나는 몇 년 만에 골목을 따라 당신을 마중 나갈 것이다.
할 말은 길어진 그림자 뒤로 묻어둔 채 우리 두 사람은
세월 속으로 같이 걸어갈 것이다.
PART 3
그와 나 사이를 가로지르는 강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
하지만 그 위론 화해의 비가 내렸고, 심지어는 가끔은 꽃구름이 흘러 다닐 때도 있다.
우리 두 사람은 강의 이편과 저편에 서서 가끔씩 손을 흔들기도 하지만
그저 바라볼 때가 사실은 대부분이다.
그의 잔소리가 언제서부터인지 모르게 살갑게 느껴지는 것은
나의 삶이 타들어가는 번뇌의 시기를 지나왔기 때문인지,
혹은 그의 삶이 휴식과 완성의 시기를 원하기 때문인지,
분명한 것은, 천진한 웃음을 띤 그의 얼굴은 아들의 어릴 적 얼굴을 닮아가고
정작 아들의 거울에 비친 얼굴은 아버지와 닮아 있다.
난들, 왜 그가 기뻐할 번듯한 세속의 성공과 안정을 주고 싶지 않았겠는가만은
아무래도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은 멀지 않은 미래에 안겨줄
그의 얼굴과 나의 얼굴을 모두 가지고 태어날 그의 손주뿐인 듯하다.
그리고 그 아이는 내가 그에게 미처 표현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언어들을
순간의 울음소리로 알리리라.
그렇게도 나는 나일 뿐이고 싶어 했으나, 이제는 또다른 그가 되어 주고 싶다.
나는 그의 육신을 나누어 받은 자...
아이는 열리지 않는 그의 방문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칭찬에 굶주리고 대화에 목이 마른 아이였다.
기다림이 원망으로 바뀌자, 아이는 망치를 들어 문에 못질을 해버리고 그곳을 떠났다.
세상의 머나먼 끝에서 고독의 눈물이 흐르던 날
아이는, 그가 스스로 방문을 열어준 적은 없었으나 문을 잠근 적 역시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가 오래 전 박아 넣은 날카로운 못들을 하나씩 빼내자 문짝에선 피가 흘렀고
문을 떠밀자 그 문은 힘없이 열렸으며 그 문의 저편엔 주름과 세월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하여, 수줍은 아버지와 겸연쩍은 아들은 난생처음 뺨을 맞대게 되었다.
언젠가 그들의 이야기는 먼지가 되리라. 세상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언젠가 이 노래는 잊혀지리라. 세상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그러나 아들은 아비를 기억하고 또 아들의 아들이 그 아비를 기억하며
그들의 피는 이야기나 노래보다는 조금 더 오래 흐르리라.
그리하여, 우리 세상에 잠시 있었던 것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야기하리라.
다른 시간, 다른 곳에서, 다시 만나...
'펌사위'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88년 제142회 임시국회 첫 대정부질의 녹취록 + 육성 [노무현 사료관] (0) | 2021.08.07 |
---|---|
조중동의 색깔몰이, 철학교수들의 용춤 [미디어 오늘 손석춘 칼럼] (0) | 2021.08.07 |
고희정 '한강보고서123' 1편 + 2편 (0) | 2021.08.05 |
세계환단학회지 안병우 교수 '이홍범의 『아시아 이상주의』 고찰' (0) | 2021.08.05 |
이홍범 박사 '아시아 이상주의' 복사본 [special thanks to '공간조아' 블로그] (0) | 2021.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