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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탈을 쓴 파시스트 '본색' [이병권 인문연구가]

뉴잭스윙 선비 2025. 3. 23. 18:24

'계몽'의 탈을 쓴 파시스트 '본색' ①
계몽은 '되는 게' 아니라 '하는 것'…다큐가 된 개그
출발은 앙시앙 레짐 무너뜨린 사회 변혁의 원동력
산업혁명-제국주의 거치며 시효 끝난 지배층 관점
민주 공화정에선 되레 독재나 파시즘으로 구현돼

“저는 (12.3 계엄령에) 계몽되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변호인의 말이 많은 이들에게 경악과 실소를 자아냈다. <대한민국 보수는 왜 매국 우파가 되었나?>의 작가 이병권은 그러나 이 한마디를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계몽주의의 성과와 한계를 짚고 그 뒤에 어린 파시스트의 관점을 포착해 냈다. 대한민국의 흑역사도 담았다. 세 차례로 나눠 소개한다. 일독을 권한다. 

지난 2월 25일 헌법재판소에서 벌어진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최종변론을 잠시 뒤돌아보겠습니다. 윤석열을 대리한 김계리 변호사의 마지막 변론의 압권은 단연 “저는 계몽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해당 변론의 마지막 진술 내용은 이렇습니다. “제가 임신, 출산, 육아를 하느라 몰랐던 더불어민주당이 저지른 패악을 확인하고 아이와 함께할 시간을 나눠 이 사건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저는 계몽되었습니다.”

김 변호사는 탄핵 심판 과정 내내 극우 집회에서나 나올법한 저급한 언동과 부적절한 인용으로 입방아에 오른 인물이죠. 심지어 엑스맨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최종변론에서도 단 하나의 영양가 있는 반박 논리나 물증도 제시하지 못한 채 오로지 북한과 중국 간첩에 의한 책동을 주장하는 기괴한 변론으로 일관했습니다. 이날 재판에 참석한 김기표 국회 탄핵소추위원 의원(더불어민주당)은 그의 황당한 주장에 대해 “공무상 재해” 수준이었다고 촌평했습니다. 음모론과 일방적 주장으로 일관한 윤석열 측 대리인단의 변론이 결국 ‘믿음’에 이르는 장면을 보여주자, 헌법재판소 브리핑룸에서 영상으로 재판을 지켜보던 기자들까지 일제히 실소를 터뜨렸다고 합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변호사냐 전도사냐”“간증하러 나왔느냐”는 비아냥이 쏟아졌고, 한 누리꾼은“국민의힘과 그쪽은 절대 정권을 잡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계몽되었다”고 적었습니다. 김종대 전 의원도 MBC라디오 인터뷰에서 “극우 세력의 분노를 자극하고 적대 감정을 끌어올렸다”라고 비판했습니다.

김계리 변호사의 ‘간증’은 한마디로 자신의 지적 수준과 몰염치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흔히 개그를 다큐로 받는다는 핀잔도 있습니다만, 섣부른 광대 짓거리 정도로 치부할 문제가 아닙니다. 국민의힘 국회의원들은 물론 광장의 극우 태극기 부대의 구호처럼 번지면서 ‘계몽되었다’라는 발언은 전적으로 다큐의 무게를 갖게 되었습니다. 다큐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하겠습니다.


태생은 매우 능동적인 사회운동

우리가 계몽(啓蒙)이라고 쓰는 단어는 영어로는 Enlightenment, 프랑스어로는 Lumières라고 쓰이는 데 모두 빛을 의미합니다. 영국의 아이작 뉴턴은 계몽을 ‘감추어진 지식에 빛을 밝히는 행위’로 정의한 바 있습니다. 모든 사상과 사회운동은 반드시 그 사상이 대항하는 대상과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 성격을 달리합니다. 계몽주의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열어가던 17~18세기유럽에서 벌어진 사상운동이자 사회운동입니다. 이 사상을 이끈 주체들은 봉건 체제의 몰락과 자본주의의 발전, 근대과학의 발전이 태동시킨 새로운 경험과 이성에 입각한 사상을 추구했습니다. 신이나 왕의 일방적인 명령보다 합리적이고, 입증 가능한 경험과 이성으로 사회와 국가의 질서를 만드는 것이 옳고, 그래야 더 나은 사회로 진보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당연히 그 주체는 새로운 인식을 깨우친 지식인과 중산층, 자본가 계급이었습니다. 이들이 발견한 새로운 사상적 무기는 교회나 왕이 주도하는 법이 아닌, 만인이 협의하여 새롭게 만드는 사회계약론, 자연법, 구체제에서 벗어나는 자유주의, 군주의 독단이 아닌 헌법에 입각한 법치주의, 교회의 간섭을 걷어낸 정교분리 등이 그 내용입니다. 주어진 믿음과 진리를 의심하고, 확인하며, 사유하여 깨우친 결과를 토대로 새로운 사회의 질서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당연히 매우 주체적이고 능동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나라에 따라 다르게 전개된 '계몽의 길'

계몽주의의 성장과 확산은 자본주의와 자연과학의 발전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나라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지만, 그 전제는 인간의 주체적 이성에 대한 확신과 함께 만들 미래 역사에 대한 낙관이었습니다. 출발 지점은 자본주의가 가장 먼저 시작된 17세기 영국입니다. 뉴턴과 존 로크, 데이비드 흄, 에드워드 기번, 애덤 스미스 등이 이 계보에 속합니다. 영국의 계몽주의는 자본주의의 성장, 과학기술의 꾸준한 발전에 힘입어 비교적 안정적으로 전개됩니다. 왕과 귀족, 교회라는 앙시앙 레짐(구체제)의 지배력이 강했던 프랑스에서는 계몽사상이 강력한 사회, 정치적 변화의 논리가 됐습니다. 볼테르, 몽테스키외, 장 자크 루소, 드니 디드로 등의 사상가들은 프랑스 혁명의 동력으로 활용하였죠. 독일의 계몽주의는 영국의 자본주의 발전, 프랑스의 체제 변혁과 달리, 철학적 측면에서 전개됐습니다. 임마누엘 칸트가 그 대표적인 인물로 꼽힙니다.

18세기 독일의 계몽주의는 '보편적 인간 이성의 이념'을 추구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계몽이 사회, 정치적 계몽인 것에 반하여 독일의 계몽은 이론적, 철학적 계몽이었습니다. 독일의 시민계급이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늦게 형성된 탓에 현실 사회의 동력이 되지 못하고, 학문의 영역으로 국한된 탓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철학적으로는 크게 발전하여 임마누엘 칸트는 영국의 경험주의와 프랑스의 합리주의를 이성 철학으로 집대성해 독일뿐 아니라 프랑스를 비롯한 주변 국가에서도 철학의 신으로 추앙받았습니다.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통해 고전적인 정의를 내놓았습니다. 계몽은 '인간이 자신의 잘못으로 초래한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정의하면서 인간 이성의 힘과 능력을 중심으로 자신의 철학을 정립합니다.

낙관적 세상을 지향했던 사회과학의 기반

계몽주의자들을 이전 시대의 철학자들과 구분시킨 핵심은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의 발전에 크게 자극받았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자연의 법칙을 인간 세계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에서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했습니다. 갈릴레오와 데카르트에서 출발해 뉴턴에 이르렀고 이들이 발견한 자연법칙은 자연과학과 산업에 적용되며 자본주의 발전을 자극하게 됩니다. 이들은 과학적 지식의 진보라는 관념에 매료됐고, 이러한 생각을 인류사 전체의 연속적 진보로 확장했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진보를 확신하는 세계관과 역사관을 탄생시킨 것이죠. 이론적으로 정립한 대표적 인물이 애덤 스미스입니다.

초기 시장경제를 주창한 스미스는 모든 자연계의 사물이 자연 법칙에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장 역시 방해가 없다는 전제로 자기 조절 체계로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왕이나 지주, 교회 등 막강한 권력을 지닌 이들의 인위적 시장개입을 막고 자유로운 시장 거래가 이루어진다면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수요-공급의 자기 조절 체계로 시장이 성장하고, 시장 참가자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갈 거라고 낙관했습니다.

한계1, 사회 모순에 둔감 

계몽주의의 한계를 지적한 대표적 인물은 카를 마르크스였습니다. 그는 인류 역사가 일정한 방향으로 진화해 간다는 점은 동의했지만 계몽주의의 낙관주의적 역사관에는 비판을 가했습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모든 인류 사회에서는 소수의 지배계급이 경제적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그렇지 못한 다수의 피지배계급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노동을 해야 하는 상황이 늘 지속돼 왔습니다. 단지 시대에 따라 지배-피지배 관계의 형태가 귀족-노예, 영주-농노, 자본가-노동자 식으로 변해왔을 뿐이라는 겁니다. 마르크스는 역사적으로 일관되게 발전해 온 것은 인간 사회가 자연 세계를 대상으로 자원을 획득하고 그걸 가공하는 생산력, 즉 산업기술과 분업방식, 기업 제도 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19세기 들어 각 국가 간에 불 붙기 시작한 식민지 쟁탈전과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사회적 모순의 격화는 이성에 기초해 낙관적 발전론을 주장한 계몽주의의 몰락을 가져오게 됩니다.

한계 2, 엘리트주의

계몽주의는 ‘무지한 민중을 지식인이 일깨운다’라는 일종의 엘리트주의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이성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나섰던 지식인들은 사회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치며 긍정적인 구실을 하였으나 다른 한편 일방적, ‘교화’적 접근 방식이 자신과 다른 생각이나 사상을 억누르고 억압하는 독재의 형태로 변모하기도 했습니다. 역설적으로 개인의 자유는커녕 전체주의로 비화할 위험을 안고 있었던 겁니다. 마르크스는 1848년 <공산당 선언>에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고 외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창하였고, 1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나 독일의 히틀러 역시 강력한 영도력을 가진 총통이 국민을 계도하고 계몽한다고 주장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 독립국의 지도자들도 강력한 국가 건설과 함께 국민 계몽을 강조했습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 역시 농촌 계몽 운동의 일환이었습니다. 윤석열이“계엄령이 계몽령”이었다는 궤변을 통해 국민들에게 무엇을 주입하려는 것인지 모르지만 위험천만한 생각임은 분명합니다. 윤석열과 그 세력이 계몽주의를 이끌었던 지식인들만큼 시대를 발전시킬 지적 능력이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민주 공화주의 체제에서 계몽주의는 독재나 파시즘의 또 다른 주장과 다름 없기 때문입니다.

한계 3, 자신 이외의 역사 폄하

18~19세기의 계몽주의자들은 계몽주의 이전과 이후가 현격히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로마제국 흥망사>를 쓴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 등은 계몽주의 이전 시대의 종교와 무지에서 빚어진 미개함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유럽사에서 중세 및 기독교가 중심이었던 시대를 헐뜯습니다. 중세는 ‘암흑시기’였다고 규정했죠. 대신, 기독교가 도래하기 전인 고대 그리스 및 고대 로마는 그 역사적 실체를 떠나 상대적으로 이성과 감성이 빛났던 시대로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은 이들의 중세 비판이 비합리적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자체가 작위적인 시대구분이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꽤 오랜 시간 정설로 강조되다 보니 지금도 많은 사람의 인식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여전히 '계몽주의적 역사관'을 생각 없이 받아들이곤 합니다.

계몽주의 역사관은 인류 역사의 기준을 서구 계몽주의 역사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보는 것을 당연시하는 사대주의적 역사관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강대국 흠모론이라고 할까요? 비유럽 국가들에 서구적 가치와 기준을 강요하는 잣대로 활용되거나, 자국 역사를 폄훼하는 악당이 됩니다. 제국주의 일본에 상륙하여 정착한 독일의 실증주의 역사학도 그 본보기입니다. 루드비히 리스(Ludwig Riess, 1861~1928)가 일본 역사학계에 전파한 실증주의 역사학은 제국주의 식민사학의 기초가 되는 한편, 서구 중심적 역사관을 한국에 전파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계속>

 

 

'계몽'의 탈을 쓴 파시스트 '본색' ②
국권 침탈 뒤 변질되기 시작한 '한국형 계몽'의 역사
산업 육성‧언론‧교육 나섰던 애국계몽, 때 이른 소멸
‘브나로드’ 사회변혁은커녕 일제 '품 안의 개량운동'
체제 변혁 의지 없이 체제 결속에 복무 '무늬만 계몽'
아는 게 힘? 우익 민족계열의 위선, 문맹률은 제자리

“저는 (12.3 계엄령에) 계몽되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변호인의 말이 많은 이들에게 경악과 실소를 자아냈다. <대한민국 보수는 왜 매국 우파가 되었나?>의 작가 이병권은 그러나 이 한마디를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계몽주의의 성과와 한계를 짚고 그 뒤에 어린 파시스트의 관점을 포착해 냈다. 대한민국의 흑역사도 담았다. 세 차례로 나눠 소개한다. 

한국 사회에서 계몽주의는 서구에서 자본주의 성장기에 자연과학의 발전과 함께 합리적인 인간의 이성에서 출발해 새로운 근대국가 설립을 지향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그 첫 번째 양상의 핵심은 일본을 비롯한 서구열강의 침탈에 맞서기 위해 일반대중의 각성을 촉구한 선각자들의 저항운동으로서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 양상은 제한된 개량적 사회 각성 운동 차원입니다. 세 번째 양상은 박정희 정권에서 나타난 바 새마을운동으로 상징되는 관 주도 농촌 개조 운동입니다. 마지막으로 최근 윤석열 내란 국면에서 나타난 극우집단의 파시즘적 계몽 운동 또는 주장입니다. 서구의 계몽 운동과 달리 한국의 계몽 운동은 수세적이고 생존을 위한 각성적 측면이 강했습니다. 반면에 최근 극우집단이 자신을 계몽 세력이라고 지칭하는 모습은 파시즘적 의식 고양 운동으로 보입니다. 한국에서 계몽의 진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국권 상실기 애국계몽운동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뒤, 일제가 침탈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본격적인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됩니다. 민족 산업 육성을 목표로 한 산업개발 운동, 자주독립의 기반을 조성하려는 언론 운동, 국민교육 운동 등이 애국계몽운동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운동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대한제국의 추동력이 뒤따르지 못했기 때문이죠.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만세보> <대한민보> 등이 간행되어 국민 계몽과 애국심 고취에 큰 구실을 담당하였고, 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 등은 사설을 통해 일제 침략상을 폭로하고 전국적인 계몽 운동을 펼쳤지만 1910년 국권 상실로 막을 내립니다. 대한제국 정부는 계몽 운동의 근거지 확보를 위해 갑오경장 이후 정부가 관립학교를 전국에 설립하였으나, 이 또한 을사늑약 이후 역할이 제한됩니다. 오히려 민간 유지들이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 확대를 도모하였고 특히 기독교 계열의 학교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습니다. 한글에 관한 연구도 주시경(周時經) 등에 의하여 본격화되어 국문연구소가 설치되고, 한글 소설·한글 신문이 간행되었습니다. <을지문덕전> <강감찬전> <이순신전> 등 외적의 침입을 물리친 영웅들의 전기와 <이탈리아 건국삼걸전 伊太利建國三傑傳>, <워싱톤전 華盛頓傳>, <피터대제 彼得大帝> 등 외국 지도자들의 전기가 출판돼 독립 의지와 역사의식 고양을 도모했습니다만, 이 역시 국권 상실로 인한 침체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데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둘째, 우익 민족계열이 주도한 농촌 계몽 운동

1920~1930년대 중반까지 일제하에 전국적으로 농촌 계몽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일제의 엄혹한 탄압으로 독립운동의 중심이 이미 해외로 빠져나간 상황에서 국내 우익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합법적 영역 안에서의 민중 계몽 운동으로 자신들의 명분과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청년 학생이나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농촌지역에서 저녁 시간대를 이용한 강연회와 토론회, 독서회, 야학 등의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학생들은 여름, 겨울방학을 집중적으로 활용하여 참여하며 문맹 퇴치와 위생 의식 고취, 생활환경 개선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국내의 우익 민족주의 진영이 농촌으로 조직을 확대하기 위한 ‘농민 획득 경쟁’의 성격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20년대 들어 일제의 식민 경영과 지주들의 착취에 대항하여 농민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됐고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이 결성됐습니다. 당시 농민 운동은 사회주의 사상 확산과 맞물려서 좌경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었습니다. 사회주의 계열 청년과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진출하여 농민들의 이해를 대변하면서 농민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우익 민족주의 계열의 농촌 운동은 대체로 문맹 퇴치와 생활 개선 등을 통해 농민의 실력을 향상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가장 적극적이었고 성과가 있었던 것은 천도교 계열이었죠. 천도교는 1925년 조선농민사를 설립해 전국적으로 운동을 확산했습니다. 야학과 농민 계몽을 넘어 협동조합 운동, 공동 경작 운동까지 진행했습니다. 기독교계에서도 1926년 이후 학생 YMCA 농촌부를 중심으로 계몽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이들은 한글 보급과 농사 개량 강습회를 개최했고, 일부 협동조합 조직도 추진했습니다. 동아일보 계열은 1928년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하려 했으나 사실상 실패로 귀결됩니다. 애초부터 독립운동이 아닌, 체제 내 개량운동이었기 때문에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는 농촌 현실을 구조적으로 개조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전개된 우익 민족주의 진영의 계몽운동을 짚어보겠습니다.

'아는 게 힘이다' 브나로드 운동

1930년대 들어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김성수, 송진우 등 우익 민족주의 계열이 전면에 나서 진행한 게 이른바 브나로드(러시아어 ВНарод, ‘민중 속으로’) 운동입니다. 브나로드는 이후 민중 계몽 운동의 고유명사처럼 쓰였는데 하필 러시아어이기에 이념대결이 치열했던 당시엔 사회주의운동으로 오해받기도 했습니다. 브나로드 운동은 러시아가 공산화(1917)되기 전인 19세기 말 일어났습니다. 일제하 농촌 계몽 운동의 내용은 1920년대 천도교와 개신교계가 전개하였던 농촌 계몽 운동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라는 말이 핵심 구호였습니다. 1930년대 사회주의 세력은 농민과 연대하여 토지 분배와 계급 투쟁을 목표로 하는 혁명적 농민조합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또한 조선 총독부는 세계 대공황기 농촌의 피폐를 막아 다가올 중국침략의 병참기지로서 농촌의 생산력 증대가 필수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사회안정책으로서 민간 주도 농촌 진흥 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했다고 보입니다.

한편, 1930년 이후 서울을 비롯한 지방 각 학교에서는 동맹휴학 등 저항이 그칠 새 없이 일어났고, 날이 갈수록 일제의 조직적 탄압과 감시는 가중되었습니다. 분기탱천하는 학생들의 관심을 ‘현재의 투쟁’에서 ‘차분한 준비론’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1929년부터 학생들은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문맹 타파 운동을 전개하였고,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이 적극 전파하면서 긍정적인 호응을 얻게 됩니다. 김성수, 송진우 등은 대학생들과 대학 출신 지식인들에게 참여를 호소했습니다. 심훈, 최용신, 곽상훈, 박순천 등의 대졸 출신 인재들이 적극적으로 부응하여 각자의 고향에 돌아가 농촌 계몽 활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당시 심훈은 중국 항저우 치장대학을, 최용신은 감리교 신학대학교를 각각 졸업한 당시로서는 대단한 엘리트였습니다. 1931년 7월, 학생들은 동아일보의 후원을 받아 ‘브나로드’의 기치를 들고 농촌 계몽 운동에 나서게 됩니다. 학생계몽대를 중심으로 하여 학생강연대, 학생기자대로 나누어 활동했습니다. 

학생계몽대는 남녀 고교생으로 구성하여 한글과 산수를 가르쳤고, 학생 강연대는 지금의 대학교 이상의 엘리트 학생들로 구성되어 학술강연, 시국 강연, 위생강연을 전담했습니다. 학생기자단은 고등학교와 대학교 학생으로 구성되며 계몽 운동 여행 일기, 고향 통신, 생활 수기 등을 신문에 투고하였다고 합니다. 심훈(1901-1956)의 소설 <상록수>는 바로 이 시기 농촌 계몽 운동을 배경으로 합니다. 소학교와 농업학교에서 공부한 채영신과 박동혁이 언론사에서 시행한 농촌 계몽 운동 보고대회에서 토론하고, 자신들이 활동하는 농촌공동체에서 한글 교육, 환경 개선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내용입니다. 동아일보에 1935년부터 1년 남짓 연재되다가 일제에 의해 중단됩니다.

일제는 1933년에 들어서면서 만주사변(1931)으로 인해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만주사변에서 벌인 만행 탓에 국제 여론이 비등해지자,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1937년부터 중‧일 전쟁을 준비합니다. 일제는 이 시기 군국주의로 무장한 본격적인 파시즘 체제로 접어들게 됩니다. 일제의 폭압 체제는 자신이 지배하는 식민지에서의 아주 작은 반발이나 이견도 철저하게 짓밟는 철권통치로 이어집니다. 우익 민족 계열의 ‘브나로드’가 막을 내리게 된 배경입니다. 일제의 통제 내에서 문맹 퇴치와 생활 개선 등의 기본적 농촌 계몽 운동이라는 체재 내적 한계가 분명한 운동이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사회주의 진영이 주도했던 혁신성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일제가 추진하던 농촌 진흥 운동의 하부운동 정도로 취급되면서 차별화에도 실패하고 기껏해야 관제 농민 운동인 농촌 진흥 운동에 포섭되는 수준에 그치게 됩니다.

혹세무민했던 이광수

혁명적 농민 운동을 전개하던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민족주의 계열의 농촌 계몽 운동을 일제와 타협한 개량 운동이라고 비판한 까닭입니다. 일제는 1933년 기존 농민 관련 단체들을 관제 농민 기구인 ‘조선농회(朝鮮農會)’로 강제 통합하는 등 농촌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관제 농촌 진흥 운동이 전면적으로 전개되면서 계몽 운동은 쇠퇴하게 됩니다. 사회주의 계열의 혁명적 농민 조합 운동도 일제의 혹독한 탄압 속에 1930년대 중반부터 쇠퇴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제에 교묘하게 부역하며 혹세무민하였던 이광수를 짚고 가야 합니다. 이광수는 민족의 정신 개조가 선행되어야 장차 독립도 준비할 수 있다는 ‘준비론’과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을 동시에 펴내면서 노골적인 친일행각을 이어갑니다. 이광수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내면서 기획과 운영, 기사화를 통한 홍보까지 사실상 브나로드 운동을 관장했습니다. 동시에 혹시라도 일제의 눈 밖에 나지 않을까 철저히 운동의 정치적 확대를 막고 철저한 민생운동으로 한계를 긋고 그 안에서만 활동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이광수의 한계와 의도는 ‘오로지 배워야 산다. 배우는 것이 곧 힘이다 !’ 라는 구호와 참가자들에게 신신당부했던 지침에 드러납니다. ‘글과 셈 이외에는 아무것도 이 운동에 혼합하지 말 것.’ ‘지방 지국의 알선을 받아 당국의 허가를 받은 후에 할 것.’ ‘동포에 대한 봉사이므로 품행에 주의할 것.’ ‘건강에 유의할 것.’

브나로드 운동(1931~1935)은 전국 1000곳에서 5,751명의 학생이 참여하여 97,598명에게 강습을 했습니다. 특히 1934년에는 만주와 일본 등 국외까지 운동을 확산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배부된 교재만 210만 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외형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첫째, 일제가 학생운동의 힘을 빼고, 농민을 순화시키려는 차원에서 제한적으로 허용했던 관제 운동이었다는 점입니다. 둘째, 가장 큰 목표였던 문맹률 저하조차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1945년 국세조사에서 한국인의 문맹률은 78%로, 1930년 문맹률 77%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문맹은 광복 이후 대대적인 퇴치 운동 뒤 개선돼 1980년 무렵 거의 완벽하게 사라졌습니다.

일제는 기초적인 문자 교육도 외면했습니다. 오로지 일제에 충성하는 식민지 신민을 길러내는 우민화 정책 때문이었죠. 읽고 쓰는 능력이 생기면 생각하고, 저항하고, 결국 일제에 반기를 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민족적 숙원이 담겼었다면 탄압을 받더라도 해외나 국내 일각에서 지하운동으로 전개되지 않았을까요?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과 마찬가지로 사회 발전은커녕 체제 결속을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됐습니다. 다음은 아직도 많은 이들이 향수를 갖고 있는 새마을운동을 살펴보겠습니다. <계속>

 

 

'계몽'의 탈을 쓴 파시스트 '본색' ③
박정희의 '계몽령' 새마을운동…농촌 근본문제 외면
프로이센 군주 '난 국가 제1 일꾼', 윤 '1호 영업사원'
윤석열 스스로 '계몽군주' 착각, 파시즘의 도래 열망
김계리 간증도, 극우의 광장 외침도, 제정일치 '망상'

“저는 (12.3 계엄령에) 계몽되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변호인의 말이 많은 이들에게 경악과 실소를 자아냈다. <대한민국 보수는 왜 매국 우파가 되었나?>의 작가 이병권은 그러나 이 한마디를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계몽주의의 성과와 한계를 짚고 그 뒤에 어린 파시스트의 관점을 포착해 냈다. 대한민국의 흑역사도 담았다. 세 차례로 나눠 소개한다. 

해방 이후 ‘계몽’이란 이름으로 정부 차원에서 주도한 대표적인 운동은 새마을운동입니다. 박정희 정권 내내 지속되었고, 그 딸인 박근혜가 지속하고 싶어 했었죠. 1961년 군부 쿠데타 뒤 박정희는 민정이양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대선에 출마, 1963년 제3공화국을 열었습니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기실 장면 정부가 구체화한 계획이었습니다. 골자는 정부 주도의 강력한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저개발국의 지위를 벗어나자는 것이었죠. 박정희 정부는 막대한 미국의 원조와 1965년 일본과 굴욕 외교 정상화의 대가로 받은 돈을 종잣돈으로 산업 육성과 수출 증대에 주력했습니다.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농촌인구가 대도시로 유입되고, 도시와 농촌 간 격차는 심각할 정도로 벌어지게 됩니다. 식량 자급률이 현저하게 떨어진 상황에서 농촌의 붕괴는 경제 전반에 심각한 위기로 인식됐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이의 타개책으로 국가 차원의 농촌 계몽 사업에 착수합니다. 바로 새마을운동입니다.

'병영식 계몽' 새마을운동

1969년 11월에 농촌근대화촉진법이 발표되고, 이어서 1971년부터 시행됩니다. 1973년부터는 대통령실과 내무부에 새마을 지도과가 설립되고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도 발족합니다.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이 신설되어 새마을운동 지도자의 교육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1975년에는 농촌지역을 벗어나 도시와 공장으로까지 새마을운동의 범위가 확대됩니다. 새마을운동은 농촌을 살리고 경제를 부흥한다는 목적으로 시행되어 농촌 계몽과 농촌 활성화를 목표로 추진되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의 기획자는 건국대학교 부총장을 지낸 농업 전문가 류태영 박사였다고 합니다. 류 박사는 덴마크 왕실의 후진국 특례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0여 년간 유럽 각국과 이스라엘 등을 다니며 농촌 계몽과 현대화를 연구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농업대학 교수를 역임한 뒤 귀국하여 새마을운동을 이끌었다고 전해집니다. 때마침 당시 국내 대표적인 시멘트 제조업체 쌍용양회가 실적 부진으로 엄청난 시멘트 재고가 쌓이면서 경영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박정희 정부로서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 부도는 막아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류 박사의 주도하에 시멘트 재고는 마침 세워졌던 새마을 계획과 결합하게 됩니다. 전국적으로 마을당 시멘트 600포가 무상 제공되었습니다. 주택개량과 도로 정비에 쓰였죠. 박정희 정부는 농촌에 기초 인프라를 제공함으로써 농민의 마음을 얻고 본격적인 농촌 개발을 추진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러나 군사작전 하듯이 밀어붙인 농촌 개발로 인해 심각한 환경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마구잡이식으로 뿌려진 시멘트는 토양과 하천을 오염시키게 됩니다. 동시에 불도저식으로 초가집을 없애고, 형형색색 슬레이트 지붕을 얻은 국적 불명의 가옥이 전국을 덮기 시작했습니다. 새마을운동은 1971년부터 기초 조성을 위해 의식을 확산하고, 1974년부터는 경제난 해결에 주력합니다. 부족한 쌀 생산증대를 위해 생산력이 높은 벼를 개발하여 이후 통일벼 등 정부 주도 품종개발사업이 확대됩니다. 1977년부터는 농어촌의 복지 향상에 영역이 확대되고, 1988년 이후에는 정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바뀌어 민주화 시대 이후에도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아프리카를 비롯한 저개발 국가의 농촌개발 모델로 수출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농촌 개발과 계몽 운동으로서의 의미가 현저히 줄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은 농촌 경제의 근간을 다지고, 경제개발 의지와 노력을 전국적으로 확대했으며, 농촌의 전근대성을 탈피하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습니다. 동시에 많은 비판을 받는 게 사실입니다. 우선, 농촌을 일사불란한 병영 체제로 만들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류태영 박사는 일찍이 이스라엘 집단농장 키부츠의 성공 사례를 한국 농촌에 적극적으로 도입하고자 하였습니다. 키부츠는 높은 생산력의 집단농장 공동체였지만, 동시에 주변 아랍국들의 공격에 대비하는 집단적 방어 체제였습니다. 새마을운동의 방향성이 정부의 결정에 적극적으로 부응하고 뒤따르는 병영 체제였다는 의심을 받을 만합니다. 실제로 마을 이장이 확성기로 새마을 노래를 들려주는 것으로 매일 아침을 시작해 각종 공지 사항이나 주의사항을 전달하는 정부의 대리기관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아파트 단지에서도 매일 아침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졌죠. 정부 지원과 정책에 따라 지역별로 희비가 엇갈리면서 농촌지역은 집권 세력에 순응하는 보수적인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둘째, 환경파괴와 몰개성의 문제입니다. 앞서 지적하였다시피 새마을운동은 무작정 결과를 향해 달리다 보니 각 지역의 개성과 문화적, 자연적 특이성을 무시하고 병영처럼 전국이 단일한 색상과 구조로 바뀌었습니다. 자연환경의 훼손보다는 개발이 우선으로 평가되었고, 실적에 쫓기는 관료주의 특성이 각 지역의 변화에 대한 숙고보다 얼마나 빨리 바꾸어 실적을 쌓는가, 얼마나 더 많은 보상을 받는가가 주요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의 단식투쟁을 계기로 1991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제도 확보 이후에야 전국의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개발은 동시에 파괴”라는 상식이 군부 독재에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셋째, 근본적인 농촌 경제의 전환점이 되지 못했던 것으로 평가됩니다. 초기에 농촌의 기본 인프라를 개선하는 효과가 있었지만, 그 외에 실질적 삶의 변화를 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유가 단순해 보입니다. 박정희 자신부터 농촌은 도시중심의 경제개발을 위한 보조 수단으로서만 역할을 기대했기에 근본적인 변화와 개발에 관심은 적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윤석열의 철지난 '흉내'

윤석열은 12.3 계엄의 이유가 국민에게 강력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강변했습니다. 야당의 무도한 입법 방해와 예산삭감, 중국 해커들의 선거 개입과 조작 등의 ‘사실’로 인해 국가가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는 것을 국민에게 ‘계몽’하기 위해서 시도한 충격요법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광장의 극우 세력들을 선동하며 여전히 ‘계몽’과 ‘국민 저항권’을 주장합니다. 백 보 양보해서 ‘계몽’의 의지가 있었다면 아마도 과거 유럽 ‘계몽 군주’의 태도를 흉내 내려 한 게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18세기 후반까지 유럽에서 가장 효율적인 정치체제는 절대왕정이었습니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은 식민지 쟁탈전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국부를 안정적으로 높이기 위해서는 군주의 강력한 통치하에 국가가 운영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근대 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이러한 절대군주의 지위는 흔들리게 됩니다. 절대군주, 귀족, 교회는 앙시앙 레짐(구체제)의 상징이었죠. 신흥 부르주아 입장에선 대단히 불합리하고 부조리하며, 사회 전체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계몽주의는 절대군주의 권위에 도전하게 됩니다. 상대적으로 자본가 계급과 지식인층의 성장이 더뎠던 나라의 군주는 계몽사상가들의 견해를 일부 받아들여 체제 안정을 도모합니다. 그것이 ‘계몽 군주’의 본질입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1712-1788),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1741-1790)가 전형적인 계몽 군주였으며,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1729-1796) 도 그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계몽 군주들은 산업과 무역의 진흥, 군사력 증강을 통해 국가 발전을 이루려 했습니다. 이러한 개혁에 필요한 선진 기술과 사상을 영국과 프랑스 등 선진국으로부터 도입하려 했죠. ‘위로부터의 개혁’을 도모했습니다. 한편으로 계몽사상을 받아들이며, 종래의 왕권신수설을 적절히 감춘 채 신흥 부르주아와 타협을 구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군주는 국가 제1의 일꾼’이라며 변화된 상황에서 절대 권력을 추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계몽 군주의 한계는 분명했습니다. 이성과 자유를 강조하지만 정작 사회구조적 변화에는 매우 소극적이었습니다. 종교 세력과 귀족들의 봉건적 특권을 개혁하려는 의지도 약했습니다. 동시에 자본주의적 발전을 추구하면서도 이를 뒷받침할 법률적 구조와 계급적 대립에는 매우 소극적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계몽 군주들은 갖고 싶은 것은 많으나, 그 대가로 자신이 내야 할 것은 차일피일 미루는 권모술수에 능했던 권력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민 기만, 영구적 집권 야심

계몽 군주의 허세를 들여다본다면 윤석열이 주장한 ‘계몽’이란 결국 국민을 기만해 자신의 영구적 권력을 유지하려는 야심과 유사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김계리 변호사의 ‘계몽되었다’라는 간증은 한 발 더 나갔습니다. 계몽시대 이전의 종교세력과 정치권력이 하나였던 ‘제정일치(祭政一致)’사회를 꿈꾸는 자의 자기 고백으로 들립니다. 동시에 광장의 극우 세력과 일체화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정일치 사회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권한과 현실 정치권력이 분리되지 않고 한 사람에게 모두 집중되는 정치체제를 말합니다. 흔히 근대사회의 기준은 자본주의의 도입 시기를 말합니다.

자본주의적 질서란 단순히 자본의 자유로운 거래와 통용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공정한 시장 거래를 위해 왕-귀족-종교라는 구체제의 간섭과 통제를 거부합니다. 종교와 정치권력이 분리되며, 법과 사회적 계약 및 기준에 따라 통치하며, 인간의 이성과 합리적 질서에 따라 국가를 구성하고, 합리적 자연에 대한 탐구를 기본으로 자연과학이 발전하는 시기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자본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가치이고, 이러한 자본주의적 질서를 추구한 것이 바로 근대의 계몽사상입니다.

김계리가 추구하는 계몽의 의미가 제정일치이고, 광장의 극우 세력이 추구하는 세상이 기독교가 지배하는 제정일치 사회라면, 우리는 그것을 바로 파시즘 체제라고 불러야 합니다. 파시즘이 추구하는 유일 가치와 독재에 의한 전 사회의 가치와 정신, 물질적 기반을 죄다 획일적으로 지배하려는 게 파시즘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이렇게 도출됩니다. 김예리가 간증한 계몽도, 윤석열이 강변한 계몽도, 광장의 극우가 외치는 계몽도 모두 파시즘의 도래를 열망하는 파시스트들의 합창이라는 것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