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고고학과 사료의 만남, <요하문명>과 <레지 고조선 사료>
<요하문명>과 고조선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뜨겁다. 작년 ‘아스달 연대기’와 같은 드라마가 제작된 것 역시 이런 대중적 관심을 반영하는 듯하다. 이 중심에는 국내 대표적 <요하문명> 연구자인 우실하 교수(한국항공대, 58)와 300년전 프랑스 레지 신부의 <레지 고조선 사료: RHROJ> 기록을 제대로 해제/사료교차검증/상호보완해 이슈화시킨 역사학자 유정희(동양고대사 전공, 38)가 있다. 2020년 2월을 맞이하여 때마침 이들의 대담이 성사되었다. 이들의 대화를 통해 관련 분야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보고자 한다. 다음은 이들의 ‘고조선 대담 총 4부작’ 중 1부이다.
◆ 현재 요하문명과 고조선의 접점을 찾고자 하는 대중들의 관심이 높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견해를 부탁드린다.
우실하: 우선 ‘고조선’과 ‘단군고조선’을 구별해야 한다. 아직도 ‘신화’ 취급을 받는 ‘단군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된 최초의 고조선이다. 1980년대 초부터 요하(遼河)의 중-상류 지역에서 지난 5000여년 동안 누구도 모르고 있었던 새로운 ‘요하문명’이 발견되면서, 기원전 2333년에 건설되었다는 ‘단군고조선’의 실존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요하문명 지역에서 새롭게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이 황하 문명과는 이질적일 뿐 아니라 한반도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정희: 사람은 누구나 전통 있고 유서 있는 오래된 그 무엇의 후손이고 싶어 한다. 그에 대한 일례로 발굴된 요하문명이 우리 민족과 어떤 식으로든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실제로 그쪽에서 발굴된 유적 등과 전통적으로 우리가 인지하는 고조선에 대한 상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 그렇다면 요하문명과 고조선에 대한 두 분의 견해는 어떠한지 말씀 부탁드린다.
유정희: 요하문명이 우리 민족의 시원이거나 아니면 최소 어떤 연관이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사료가 필요하다. 곧, 발굴된 요하문명과 일치하는 사료가 있는지 찾아야 한다. 현재로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은 정치적인 기록이 아니다. 정치적인 사건의 기록은 <레지 고조선 사료: Regis’s historical records on Old Joseon, RHROJ - 유정희 명명>, 일명 <레지 사료>이다.
<레지 사료>에는 소략하나마 고조선(레지가 Coree로 기록)과 중국 하(夏), 상(商)왕조와 전투 장면이 기록돼 있다. 내가 이를 백년 전 독립운동가 김교헌 선생 등이 쓰신 <신단민사/실기> 등과 사료 교차검증(cross-examination) 하였고, 다른 신문에서도 고맙게 언급해 주셨지만, 이를 더 나아가, ‘서경-후한서 동이열전-삼국유사-레지사료-신단민사/실기’ 등으로 사료 상호보완(reciprocal complementation)하여 고조선 역사의 기본 틀과 큰 뼈대를 만들었다. (한국강사신문 2019. 2. 12. 고조선 논쟁, 역사학자 유정희, 살아나는 사료들 참고)
우실하: 현재도 우리나라 중-고 역사교과서에서는 비파형동검 등이 분포하는 만주 일대를 ‘고조선 영역’, ‘고조선의 문화권’, ‘고조선의 세력 범위’ 등으로 가르친다. 요하문명이 발견된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새롭게 발견된 요하문명이 우리와 상관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미 중국학계에서도 ‘요하문명의 꽃’인 홍산문화(紅山文化: BC 4500~3000)의 후기(BC 3500~3000)에는 ‘초기 문명 단계’ 혹은 ‘초기 국가 단계’에 진입했고, 청동기시대인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 BC 2300~1600) 시기에는 국가 단계에 진입했다고 보고 있다.
예를 들어 중국 고고학의 대부인 (고)소병기(蘇秉琦: 1909~1997) 선생은 홍산문화 시기에는 ‘고국(古國)’이, 하가점하층문화 시기에는 하-상-주와 같은 ‘방국(方國) 단계의 대국(大國)’이 존재했었다고 본다. 설지강(薛志强)은 하가점하층문화 시기에 ‘하(夏)나라보다 앞서 건설된 문명고국(文明古國)’이 있었다고 본다. 나는 홍산문화를 바탕으로 하가점하층문화 시기에 건설된 ‘방국 단계의 대국(소병기)’, ‘하나라 보다 앞서서 건설된 문명고국(설지강)’이 바로 ‘단군고조선’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며 시기적으로도 일치한다.
◆ 관련분야의 국내 연구 진척에 대한 두 분의 평가는 어떠한가?
우실하: 나는 요녕대학교 한국학과 교수(2000.2~2002.8)로 있던 시기부터 20년 동안 요하문명 지역을 답사하고 요하문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여러 논문과 4권의 책을 출간했다. 그러나 아직도 국내 고고-역사학의 주류학계에서는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위 재야학계에서 열광할수록, 오히려 주류학계에서는 멀리하는 내가 예기치도 않는 이상한 형국이 벌어지고 있다.
유정희: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현 한국고대사 관련 역사학계에서는 되도록 요하문명과 고조선이 연관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연관이 있든 없든 그러면 일단 검토를 제대로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나 문제는 검토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이슈화시킨 <레지 사료>는 요하문명과 고조선을 연결시켜 주는 중요한 연결고리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레지 사료>는 고조선이 유구한 나라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증명해줄 거의 유일한 ‘해외작성사료(historical record of Old Joseon produced by non-Korean writers)’이기 때문이다.
② 요하 유역 고고학(요하문명)과 프랑스 사료(레지 사료)의 만남
<요하문명>과 고조선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뜨겁다. 작년 ‘아스달 연대기’와 같은 드라마가 제작된 것 역시 이런 대중적 관심을 반영하는 듯하다. 이 중심에는 국내 대표적 <요하문명> 연구자인 우실하 교수(한국항공대, 58)와 300년전 프랑스 레지 신부의 <레지 고조선 사료: RHROJ> 기록을 제대로 해제/사료교차검증/상호보완해 이슈화시킨 역사학자 유정희(동양고대사 전공, 38)가 있다. 2020년 2월을 맞이하여 때마침 이들의 대담이 성사되었다. 이들의 대화를 통해 관련분야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보고자 한다. 다음은 이들의 ‘고조선 대담 총 4부작’ 중 2부이다.
◆ (고조선 대담①의 마지막 질문/답변에 이어서) 그렇다면 그런 문제점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유정희: 나는 작년 7월 중순 출간한 나의 책 <18세기 프랑스 지식인이 쓴 고조선, 고구려의 역사>에서 한국고대사가 선천적으로 가진 문제점에 대해 얘기하였었다. 그것은 바로 ‘사료의 부재’라는 점이다. 사료가 너무 적다 보니 결국 기존 유명 선학(先學)의 연구성과가 연구 바로미터(기준)가 되는 구조이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선학들이 이미 연구해 놓은 걸 큰 틀에서 바꾸면 선학들의 권위에 알게 모르게 손상이 가게 된다는 뜻이다. 그들이 꼭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는 구조적인 문제이다. 그러니 결국 자꾸 곁다리, ‘가지치기’만 하든가, 이도 아니면 선학들 보다 더욱 수구적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 선학들이 대부분 일제시대 일본인 학자를 스승으로 두기에 다분히 알게 모르게 그들의 주장은 ‘반도사관’ 등의 한계를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또한 설령 후학(後學)들이 혁신적으로 나가더라도 결국 많이 나가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우실하: 『환단고기』가 세간에 알려지면서 재야사학과 강단사학 사이에 많은 갈등이 있어왔다. 나는 『환단고기』를 사서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요하문명에 대해 최초로 본격적으로 소개한 나의 책들을 반긴 사람들이 바로 재야사학자들과 일부 민족종교인 쪽이었다. 그들은 요하문명의 발견으로 단군조선 이전의 배달국과 환국의 실체가 드러났다고 대대적으로 반기고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연구도 안 해본 주류학계에서는 요하문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모든 사람을 ‘환빠’로 몰아가는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재야사학계에서 열광하면 할수록, 주류학계에서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참으로 기가 막힌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필자로서는 정말 난감하고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나!’라는 속담이 있다. 우리 주류학계가 바로 그 꼴이다.
요하문명에 대한 연구는 (1)식민사학을 둘러싼 사학계의 갈등이나, (2)이른바 재야사학과 강단사학 사이의 갈등, (3)민족주의사학이나 실증주의사학 등등의 문제와도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수천 년 동안 묻혀 있다가 새롭게 드러난 요하문명이 우리의 상고사-고대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연구하는 것은 학자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중국학계에서는 요하문명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그들의 상고사를 완전히 재편하고 있는데, 이 지역이 고조선의 강역/영향권/문화권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하고 있는 것은 한국학계의 직무유기일 뿐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어야 한다.
◆ <요하문명>이나 <레지 사료>에 대해 추후 고조선 관련 역사학계에서는 어떻게 나올 것 같나?
유정희: 재작년 내가 다른 신문사 인터뷰에서도(데일리그리드, 2018. 11. 6. -역사학자 유정희, 해방 이후 최대 역사논쟁인 ‘고조선 논쟁’ 종지부 찍나? - 참고) 이미 말했듯이 <레지 사료>를 ‘인식사(어느 시점에서 만들어진 허구이자 기억의 역사)’로 정리할 것 같다. 이를 일반인도 알아들을 수 있게 아주 쉽게 설명하자면, “300년전 그때 그런 얘기 이미 많았다. 레지 신부가 당시 잘못 보고 잘못 적은 것이다.” 등등이다.
가령 내가 재작년 인터넷 검색하다 발견한 아마 사학과 여학생으로 추측되는 사람이 쓴 글 중 이런 글이 있더라. 이 <레지 사료>에 대해 적은 글이었는데, 이를 이렇게 설명했더라. 뭐냐 하면, 고려말부터 당시 그런 얘기 이미 많았고, 사실 단군신화 등도 알고 보면, 고려말 고려임금(환웅)과 상국(上國)인 원(元)나라 공주(곰)의 혼인과 결혼생활 중 거친 원나라 공주를 길들이기 위한 방편이나 희망으로 그리 만들어진 것이라 하더라. 아마 그 학생은 본인의 생각이기 보다는 자기 교수가 한 얘기를 적어 놓은 것 같았는데, 내가 듣기에도 아주 재밌는 비유이자 흥미로운 얘기였다. 근데 내가 여기서 하나 되묻고 싶은 게 있다. 바로 “그런 증거가 어딨냐?”는 것이다! 사학과 석박사 대학원 다녀본 사람은 알겠지만, 고대사(古代史)에 있어서 무슨 추측이나 상상을 하면 교수가 곧잘 하는 얘기가 있다. 바로 “그런 증거 있나? 자네는 소설 좀 쓰지 말라!”고 한다. 어찌 보면 역으로 이게 꼭 그 꼴이다. 다시 한 번 되묻는다. 당시 그런 얘기 많았고, 레지가 잘못보고 잘못 썼다는 증거, 단군신화가 고려임금에게 시집온 상국인 원나라 거친 공주 길들이기 위한 희망이나 바람의 표현이었다 등등의 이야기들, 도대체 이게 그거라는 그런 증거가 어디 있냐?
우실하: 요하문명 지역에서 발견된 고고학 자료들은 모두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Fact)’이다. 고고학 자료는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서 기록된 ‘사료’와는 달리 처음부터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물론 발견된 유물에 대한 해석을 달리할 수는 있다. 따라서 앞으로 요하문명 지역의 고고학적 자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학자들이 늘어날 것으로 본다.
레지 신부의 자료, 곧 <레지 사료>는 환단고기 류의 책들이 나오기 훨씬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한국 상고사 연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레지 신부의 기록이 새롭게 드러난 요하문명의 고고학적 자료와 만나면 새롭게 조명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또 그래야만 한다.
◆ 고조선 관련 역사학계는 왜 고조선에 대해 항상 작게만 보려고 하는가?
우실하: 나는 크게 두가지 원인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고조선은 신화이고, 만주일대나 한반도에서 기원전 2300년경에 국가 단계에 진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선입견이다. 다른 하나는 1980년대 이후 요하문명이 새롭게 발견되기 전까지 요동-요서를 포함한 만주일대는 ‘야만인의 땅(?)’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변변한 고대 문명의 흔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입견은 요하문명의 발견으로 여지없이 깨졌다. 이제는 요하문명을 바탕으로 새롭게 상고사를 재해석해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유정희: 음.... 내가 본래 전공한 동양 고대사만 하더라도 사료가 그렇게 적지는 않다. 그래서 다양한 의견이 많고 다양한 연구가 가능하다. 문제는 한국 고대사는 사료가 너무 적다. 특히 고조선에 대해서는 더욱 심하다. 아무튼 그래서, 반복하지만 한국 고대사는 기존 선학이 해 놓은 연구가 기준(바로미터)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이를 크게 뒤틀 경우 선학의 권위가 무너질 우려가 있다. 그래서 더욱 수구적으로 나가든지, 아니면 큰 틀에서 그대로 두고 가지치기만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문제는 기존 윗대 선학들의 연구가 일제하의 일본인 스승 등의 영향으로 알고 보면 ‘반도사관’ 등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고조선에 대해서는 항상 작게만 보는 게 습관이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러니 대중은 학계를 못마땅해하고 둘이서 큰 괴리가 알게 모르게 생긴 것 같다. 문제는 가뜩이나 우리 고대사를 자꾸 작게만 봐서 학계에 불만인 대중이 언제까지 이를 그대로 묵과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 프랑스어 원문 <레지 사료>를 ‘사료 선점’ 측면에서 어떻게 볼 수 있나?
유정희: 사료가 극도로 부족한 고조선학(古朝鮮學)에서 일단 이 정도 완전 공개된 기록이라면 해방 이후 지난 70년간 이에 대한 논문 최소 1백편은 이미 나왔어야 한다. 어찌 보면 <레지 사료>가 맞고 틀리고는 중요하지 않다. ‘사료 비판’을 장대하게 했어야 했다. 가령 단군신화가 실린 <삼국유사>에 대한 사료 비판은 얼마나 많은가. 관련 조금이라도 언급된 논문이 아마 천 편은 넘을 것이다. 그러나 학계는 <레지 사료>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사료 비판’ 논문이 사실상 하나도 없었다. 이유는 내가 다른 칼럼 등에서도 이미 언급했지만(일간스포츠 2019. 11. 4 -어느 미국인 학자의 혜안과 한국 고대사학계- 참고), 첫째는 일부 주류 고조선 관련 역사학계가 프랑스어나 영어 등 서구어에 서툴러서이고, 둘째는 중국 고대 하상주(夏商周) 배경지식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 고대사 관련 연구자들은 매우 부지런한 편이다. 나도 과거 옆에서 오래 지켜봤지만, 사료에 비해 연구자들은 상당히 많은 편인데, 그래서 그런지 연구서나 논문이 매일 쏟아진다. 신기한 건 그들은 연구서나 논문이 나오는 족족 바로 읽어보고 바로 파악한다. 당시 나도 놀랄 정도였는데 우리 같은 동양사 전공자는 연구서나 논문이 나와도 한참 뒤에나 찾아보는 경우가 많은데, 대조적으로 그들을 보면 마치 잘 훈련된 군대나 빈틈없는 톱니바퀴 같았다. 어찌 보면 역으로 이게 <레지 사료> 사료 선점을 놓친 원인일 것이다. 애초 사료가 없다고 생각하고 이미 사료는 다 알고 있으니, 연구서나 논문 등만 빨리 파악하는 것에 최적화된 것이다.
③ ‘요하문명’과 ‘레지 사료’, 만들어지는 고조선 역사의 뼈대
‘요하문명’과 ‘레지 사료’, 그리고 고조선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뜨겁다. 작년 ‘아스달 연대기’와 같은 드라마가 제작된 것 역시 이러한 대중적 관심을 반영하는 듯하다. 이 중심에는 국내 ‘요하문명’ 최고 권위자인 우실하 교수(한국항공대, 58)와 300년전 프랑스 레지 신부의 ‘레지 고조선 사료: RHROJ’ 기록을 제대로 해제/사료교차검증/사료상호보완 해서 이슈화시킨 역사학자 유정희(동양고대사 전공, 38)가 있다. 2020년 봄을 맞이하여 때마침 이들의 대담이 성사되었다. 이들의 대화를 통해 관련분야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보고자 한다. 다음은 이들의 ‘고조선 대담 총 4부작’ 중 ③부이다.
◆ 그렇다면 요하문명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한반도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인가?
우실하: 요하문명 지역에서 한반도로 연결되는 것들을 시기별로 간단히 소개하면, (1) 중석기 시대부터 이어지는 세석기 문화, (2) 9000년 전 소하서문화 시기부터 시작된 빗살무늬토기 문화, (3) 8000년 전 흥륭와문화 시기부터 시작된 옥결(옥으로 만든 귀고리) 문화, (4) 흥륭와문화에서 시작되어 홍산문화에서 꽃피는 각종 형태의 돌무덤과 적석총, (5) 7000년 전 부하문화 시기부터 시작된 골복(骨卜: 동물의 뼈를 이용한 점) 문화, (6) 4300년전 하가점하층문화 시기부터 보이는 ‘치를 갖춘 석성’, (7) 3000년전 하가점상층문화 시기부터 보이는 비파형동검 등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이 가운데, (1), (2), (4), (6), (7)은 비슷한 시기에 황하문명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며, 한반도와 연결되는 것들이다.
◆ 만주 일대는 건조한 유목지대인데, 어떻게 그런 곳에서 찬란한 고대문명이 꽃 필수 있었다는 것인가?
우실하: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질문을 한다. 요하문명이 발견된 지역은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 지역으로, 현재는 한가운데에 동서 500km 남북 200km에 달하는 우리 대한민국 만한 과이심사지(科爾沁沙地, 카라친사지)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요하문명이 꽃 피던 시기에는, (1) 동아시아 계절풍(=태풍)이 만주 지역까지 올라왔었고, (2) 물도 풍부하고 기온도 높았으며 습도도 높은 사람이 살기 좋은 지역으로 현재 한반도 중부 지역과 비슷한 기후 조건으로 문명이 꽃피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것들이 요하문명 지역에서 발견된 것도 놀랍지만, 나는 현재 발견된 것의 수십 배 혹은 수백 배의 유적이 사막에 묻혀서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고 본다.
유정희: 나처럼 본래 중국 고대 역사, 그중 선진사(先秦史)를 전공한 사람들에게는 상식 같은 게 하나 있다. 무엇이냐 하면 만주나 요서, 요동 일대가 춘추전국시대 이전까지는 사람이 살기 꽤 괜찮은 환경이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황하일대 상(商), 주(周: 西周)나라 청동기에 코끼리, 코뿔소 모양이 보이는 것은 당시 황하나 장강 일대가 그런 동물들을 보기 어렵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요하문명 지역에 그러한 찬란한 고대문명이 꽃 필수 있었다는 것은 막연한 뜬구름 잡는 얘기가 아니다. 덧붙여 동양고대사 전공자로서 말하는데, 사실 춘추전국시대 같은 혼란기도 이러한 당시 중국 중원지역의 급격한 환경변화가 원인이 됐다는 가설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논문도 준비하고 있는데 여러모로 흥미로운 시각 같다.
◆ 소위 ‘요하문명의 꽃’이라는 홍산문화(紅山文化)의 문화적 수준이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
우실하: 홍산문화는 기원전 4500-3000년까지의 고고학 문화다. 특히 홍산문화 후기인 기원전 3500-3000년에는 이미 ‘초기 국가 단계’ 혹은 ‘초기 문명 단계’에 진입한다고 보고 있다. 홍산문화에서는, (1) 인간 실제 크기의 1-3배에 이르는 등급이 다른 여신이 등장하여 이미 ‘주신(主神)’ 개념이 등장하고, (2) 학자들은 당시에는 이미 최소한 6-7등급의 신분분화가 되어 있었고, (3) 수많은 옥기(玉器)와 거대 적석총들이 출현하여 옥장인과 석장인도 직업적 분화되어 있었고, (4) 한 변이 20-3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피라미드식 적석총’이 등장하며 최대는 지름이 60미터의 7층 피라미드 형식이며, (5) 3층 원형 천단(天壇)은 정사각형의 내접원과 내접원 등의 개념을 통해 설계되었으며, (6) 1인의 지고무상한 왕급에 해당하는 절대 권력자가 이미 탄생했고, (7) 신분이 높은 이들은 이미 머리카락을 정갈하게 위로 올려 관(冠)을 쓰고 옥 귀고리를 했으며, (8) 신분에 따라 크기가 다른 묘를 사용하는 등 예제(禮制)가 확립되어 있었다. 그래서 ‘초기 문명 단계’ 혹은 ‘초급 국가 단계’에 진입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유정희: 홍산문화는 이미 상당히 발전된 수준이다. 위에 우(禹) 교수님이 그 발전도에 대해 이미 언급하셔서 자세한 건 언급하지 않겠지만, 사실 이에 대해 일반인들은 중원 지역보다 왜 요하유역이 먼저인지 의문인 사람들이 꽤 있더라. 그러나 이는 이상한 것이 아니다. 학술적으로 좀 더 다양한 검토가 필요하지만, 아시아 지역보다 문명이 빠른 중동지역의 기술문명이 요하유역으로 전달되는 게 훨씬 유리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므로 중원지역보다 요하 유역이 빠른 것은 비상식적인 게 아니다. 오히려 어찌 보면 요하유역 보다 문명 발생이 약간 늦을 수도 있는 중원지역이 어느 시점에 어떻게 그렇게 빨리 요하유역 쪽 문명을 따라잡은 걸 연구하는 게 더욱 관건일 것이다.
◆ ‘삼국유사’ 등 우리나라의 사료에서는 단군조선이 ‘요임금과 같은 시기’ 혹은 ‘요임금 50년 후’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최근 중국에서는 요임금의 도성이 발견되었다고 하던데...
우실하: 2015년 12월 18일 국무원기자회견실에서 ‘중화문명탐원공정’을 마무리하며 도사(陶寺) 유적이 전설적인 요(堯) 임금의 수도인 평양(平陽)이라고 정식으로 공표하였다. 산서성 임분시 양분현의 도사 유적은 요임금의 도성 유적으로, (1) 내성과 외성을 갖춘 이중성 구조로 기원전 2500-2000년까지 사용되었고, (1) 전체 유적지 면적은 430만 평방미터, 외성(外城) 안의 면적은 280만 평방미터, 왕과 귀족들이 살던 내성(內城) 안의 면적만 13만 평방미터에 달한다. 발굴보고서에서 “도성은 기원전 2400년경 방국(方國) 단계의 수도”라고 보고 있고, 세계 최초의 천문대와 외성 밖 제단을 갖추고 있다. 또한 갑골문보다 1천년 앞서는 최초의 문자도 발견되어 전설적인 요순시대는 실제 역사임을 공표한 것이다.
‘삼국유사’ 등 우리나라의 사서에서는 단군고조선이 ‘요임금과 같은 시기’ 혹은 ‘요임금 50년 후’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도사 유적의 발견으로 요임금이 실존인물임이 유력해진 이상, 그와 비슷한 시기에 존재했다는 단군과 고조선이 실재(實在) 역사일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본다.
④ 〈요하문명〉과 〈레지 사료〉, 복원되는 고조선 역사
〈요하문명〉과 〈레지 사료〉, 그리고 고조선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뜨겁다. 작년 ‘아스달 연대기’와 같은 드라마가 제작된 것 역시 이러한 대중적 관심을 반영하는 듯하다. 이 중심에는 국내 <요하문명> 최고 권위자인 우실하 교수(한국항공대, 58)와 300년전 프랑스 레지 신부의 <레지 고조선 사료: RHROJ> 기록을 제대로 해제/사료교차검증/사료상호보완 해서 대중화시킨 역사학자 유정희(동양고대사 전공, 38)가 있다. 2020년을 맞이하여 때마침 이들의 대담이 성사되었다. 이들의 대화를 통해 관련분야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보고자 한다. 다음은 이들의 ‘고조선 대담 총 4부작’ 중 ④부이다.
◆ 누구도 알 수 없었던 거대한 <요하문명>이 발견된 이후 이미 반세기 가까이 지났는데... 그렇다면 이제 우리 학교에서도 이를 가르쳐야 하는가?
우실하: 현재 중국에서는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 2004-2015)’을 주도했던 중국고고학회 이사장 왕외(王巍)의 건의로 2015, 2016년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두 차례에 거쳐서 ‘중화문명전파(선전)공정(中華文明傳播(宣傳)工程)’이 제안되어 있다. 그는 중국고고학회 이사장이면서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소장을 겸하고 있고, 또한 인민대표이기도 한 역사-고고학계의 최고 실력자이다.
‘중화문명전파(선전)공정’의 핵심적인 내용은 요하문명과 도사유적의 발견 등으로 중화민족 5000년의 역사가 증명되었으니, (1)관련 유물들을 전 세계를 순회하며 전시하고, (2)초-중등-대학의 역사교재를 새로 쓰고, (3)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100부작 다큐멘터리, 100권의 소개 책 시리즈, (4)어린이들을 위한 30-50부 작의 만화영화와 100부작 만화책 등을 통해 중화문명의 우수성을 국내외에 ‘선전’하고 ‘전파’하는 것이다. 그의 무게감으로 보면 조만간 새로운 공정이 시작될 것이고,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쓸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의 여러 검인정 역사교과서 가운데 ‘홍산문화’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소개하고 있는 것은 단 1종뿐이다. 그것도 본문이 아니라 참고 사항처럼 박스 처리되어 있다. 이것이 ‘요하문명의 꽃’으로 불리는 홍산문화를 소개하고 있는 유일한 국내 역사교과서이다.
필자는 항공대에서 2017년부터 ‘요하문명의 이해’라는 교양과목을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나라 대학에서 요하문명과 관련해서 개설된 유일한 과목일 것이다. 요하문명을 바탕으로 동북아시아 상고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이제는 우리나라 초-중등-대학에서 요하문명에 대해서 가르쳐야 하고, 역사교과서도 새롭게 준비해야 한다. 요하문명의 발견은 부정할 수 없는 팩트(fact)이기 때문이다.
◆ 요하문명을 중국 측의 일방적인 입장이 아닌 새로운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
우실하: 요하문명을 중국인의 시조라는 황제족(黃帝族)의 문명으로 끌고 가려는 시각 변화는 한-중 간의 새로운 상고사 갈등을 예고하고 있다. 중국 고고학의 대원로인 (고)소병기(蘇秉琦: 1909~1999) 선생은 요하문명과 황하문명과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서 ‘Y자형 문화대’ 이론을 제시했다. 그러나 ‘Y자형 문화대’ 이론은 요하문명과 중원과의 관계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 한반도와의 연계성을 설명할 수 없다.
필자는 ‘제10회 홍산문화 고봉논단’(2015.8.11.-12 내몽고 적봉대학)에서 「요하문명과 ‘A자형 문화대’」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A자형 문화대’ 이론은 요하문명을 ‘동북아시아 공통의 시원문명’으로 삼아서, (1)요하문명 지역에서 서남방으로 중국의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노선, (2)요하문명 지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연결되는 노선, (3)장강 하류 지역에서 해로(海路)로 한반도 남부와 일본으로 연결되는 노선을 상정하고 있다. 필자의 이론은 발표 당시 많은 중국학자들도 동의하는 관점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자들은 아직도 이런 관점을 지니고 있지 않다. 필자는 ‘A자형 문화대’ 이론의 근거로, (1)옥결의 분포, (2)빗살무늬 토기의 분포, (3)각종 적석총의 분포, (4)비파형동검의 분포, (5)치(雉)를 갖추 석성의 분포 등을 제시하였고 중국학자들도 대부분 동의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요하문명은 중국만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북아 공통의 시원문명’이라고 본다. 많은 요소들이 고대 한반도, 일본, 몽골 등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요하문명의 발견이 새로운 역사 갈등의 단초가 아니라, ‘동북아 공통의 시원문명’이라는 인식 아래 ‘21세기 동북아 문화공동체’를 향한 밑거름이 되기를 희망한다.
◆ 마지막으로 이건 본래 역사학자인 유(Yu) 선생에게 묻는 건데... 혹, 고조선에 대해 마지막으로 학계에 바라는 것이 있나? 또한 추가적으로 하고 픈 말이 있나? 더불어 앞으로의 본인 계획은?
유정희: 고조선에 대해 말인가? 이미 눈치 챘겠지만 나는 고조선에 대해 주류 역사학계에 바라는 게 없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실 알고 보면 학계에 정말 착실하고 성품도 좋은 분들도 많다. 속된 말로 돈도 안 되는 것 하면서 누가 뭐라해도 묵묵히 학문에만 정진하시는 점잖은 분들도 옆에서 많이 봐 왔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고조선에 대해 학계에 바라는 게 없다. 인정받으려는 마음도 없다. 학계에 인정받아 뭐하냐? 학계가 노벨상, 퓰리처상, 필즈상이라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당연히 바라는 것도 없다. 고조선에 대해 내가 그렇게 하라고 한다 해서 할 것도 아니지 않는가?
사실 ‘역사(history)’란 학문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헤이든 와이트(Hayden White) 교수의 말을 굳이 빌리자면, 어느 정도 각색된 역사적 기록(사료)을 ‘plot’을 구성하여 ‘narrative’ 방식으로 살을 붙이는(beef up) ‘픽션(fiction)’인데1) 사료가 워낙 적은 고조선학(古朝鮮學)에 대해서는 이것이 그대로 적용되긴 힘들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의 기초인 그 ‘뼈대’를 만드는 작업은 어느 정도 할 수 있다. 고조선학은 사료가 극도로 적긴 하지만, 위서(僞書: forged books)들을 제외하고도 그 뼈대복원 정도는 가능하다. 가령 내가 이미 작업한 것처럼 300년전 <레지 고조선 사료(Regis’s historical records on Old Joseon, RHROJ: 일명 ‘레지 사료’)>와 100년 전 김교헌 등의 <신단민사/실기>와 교차검증(cross-examination)하고, 이를 <삼국유사>, <후한서>, 더 나아가 <서경>의 기록과 상호 교차검증, 상호보완(reciprocal complementation)하면 충분히 고조선학의 신실(信實)한 뼈대 정도는 살릴 수 있다. 사실 위의 우실하 교수님 주장이나 나의 주장은 누가 들어도 합리적인 주장이다. 흔히 masstige(대중적 명품)를 지향한다는 인문학, 그중 역사학에서 이 정도면 왜곡은커녕 과장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 의아하기도 한 게 740년전 일연, 300년전 프랑스인 레지 신부, 100년전 독립운동가 겸 국학역사학자(國學歷史學者)인 김교헌 등 모두가 우리 고조선이 유구하다는데, 우리 특정학계만 자꾸 아니라고 한다. 몇 년 전 지리산 근처 암자의 어느 스님이 지리산 폭포수가 절경이라고 극찬하더라.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과 연계되는 것은 크게 가치를 높이는 편이다. 그러함에도 고조선의 유구성은 도리어 우리나라 특정 학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필요한 건 시간일 뿐이라고 최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대중이나 합리적인 사람들은 충분히 나나 우 교수님 주장을 납득할 것으로 본다.
마지막으로 나의 앞으로 계획은 그냥 내가 좋아하는 역사, 그 중 우리 역사를 순수하게 좀 더 연구해 보고 싶다. 꼭 고조선이 아니더라도 그냥 다른 고대사도 좋고, 중세사(고려)도 좋다. 고대, 중세면 아무거나 괜찮다.
이상으로 이들의 고조선 대담을 마친다. 추후 필요 시 2차 대담도 기대해 본다.
각주
1) Hayden White, Metahistory: The Historical Imagination in Nineteenth-century Europe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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