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에 대한 평가는 이제부터다 (상)
- 전쟁영웅(?)이 필부로 돌아가야 할 이유 -
우리네 보수 참칭 우익들에게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숭앙받던 백선엽이 백 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형식논리로만 보면 참 오래도 사셨고 그만큼이나 인생에서 밝은 면 그리고 좋은 것을 너무도 많이도 누린 행복(?)했던 인생입니다. 불과 서른셋의 나이에 대한민국 최초의 사성장군인 대장이 되었고 두 번의 참모총장과 한 번의 합참의장을 역임한 화려한 군경력에 전역 후에는 교통부 장관과 각종 공기업의 요직을 두루 지냈습니다.
이후 아주 오랜 세월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미국 군인들에게까지 큰 존경을 받으며 천수까지 누렸으니 실로 성공한 멋진(?) 인생입니다. 형식논리로만 보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도 같은 질감과 균등한 재질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백선엽에 대한 평가는 이제 그의 관을 닫고 땅에 묻게 되는 지금부터가 정말로 시작입니다.
객관적으로 한국전쟁 내내 백선엽은 실제 전투에서 같은 일본군 출신의 부역자였던 채병덕이나 유재흥 같은 무능 무책임한 인사들이 저질렀던 역대급 판단 착오나 비겁하기 짝이 없는 망동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대장이 되었던 정일권과 이형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독재자 이승만과 한국군의 패트런이자 대부였던 미군의 말을 아주 잘 들었고 늘 순종했기에 그 빛나는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하나하나 따져 보면;
백씨가 한국전쟁 초기와 이후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서 엄청난 전공을 세웠다고요?
50년 6월 25일 당일 그는 1사단장으로 예비연대인 11연대와 함께 서울에 가까운 수색에 머물고 있었고 38선 최전방의 12연대와 13연대의 전투상황에 직접 개입하지 못했습니다.
개전 당일 12연대가 궤멸되었으나 문산 쪽을 지키던 김익렬(제주 4.3의 진실을 유고로 남긴 분)대령의 13연대가 필사적으로 이틀이나 버틴 덕분에 전체 사단이 무너지지 않고 한강을 건너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요컨대 백선엽의 공로라고만 보기엔 어폐가 있다는 말입니다.
낙동강 전선의 혈투에 대해 백선엽은 자신의 회고록과 여러 인터뷰에서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라는 기개와 각오로 전선을 사수했다고 밝혔지만, 낙동강 전선에서 ‘버티거나 아니면 죽어라(Stand or Die)’ 하며 전선의 모든 부대에 ‘결사항전의 모토’를 하달한 이는 사실 백씨가 아니라 당시 낙동강 방어선의 총지휘관인 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이었습니다. 그때의 미군과 한국군의 상황은 버티지 못하면 끝장인 절체절명 그 자체였던 겁니다. 그리고 같은 시기 안강과 기계를 사수하고 있었던 3사단장 이종찬 장군 역시도 ‘사수를 실패하면 자결한다’는 각오를 밝히며 분전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결국, 낙동강을 지키던 모든 부대의 지휘관들이 이와 비슷한 정신자세로 임했다고 봐야 합니다. 백씨의 공로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 그러함을 유념해야 합니다.
거기에 더해 한국전쟁 내내 한국군의 역할이나 위상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만큼 절대적이거나 대단한 위치에 있지 못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합니다. 대단히 안타깝게도 한국군은 전쟁기간 내내 크나큰 판단착오나 오류를 범해 전체 전선을 극도로 위험에 빠트린 결정적인 구멍역할(1. 한국전 초기 축차투입 2. 50년 겨울 2군단 붕괴 3.51년 봄 현리 3군단 붕괴)을 한 반면,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의 분전이나 가평전투에서의 캐나다 여단, 쌍굴다리 전투에서의 프랑스 몽클라 대대처럼 압도적인 적을 맞아 싸워 전황을 뒤바꾼 사례가 거의 없습니다.
전쟁개시 10개월 동안 무려 11개 사단 분량의 장비와 물자를 망실해 적군에게 물자를 공급했던 호구였던 사실은 신생국가 초보 군대기에 어쩔 수 없다 쳐도 전투에선 등신이었으나 거창양민학살 사건과 같은 학살에는 귀신이었던 행적은 도저히 쉴드를 쳐줄래야 쳐줄 길이 없기에 이러한 어두운 이면에 대한 냉정하고 객관적인 재평가가 이뤄진다면 백씨의 한국전쟁 공로는 사실 그닥 대단할 게 없습니다. 도리어 그보다 더한 공을 세우고도 여태 알려지지 않거나 상찬받지 못한 무수한 숨은 영웅들을 재발굴하여 현양해야 할 것입니다.
뒤져보면 혼자 한국전쟁의 영웅인양 떠드는 백씨의 행적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의외로 같은 만군 출신들이 많답니다. 여기에 더해 백선엽이 처음 참모총장에 임명되던 시기를 보면 그가 얼마나 권력자들과 미군의 입맛에 입 속의 혀처럼 굴었던 인물인지 잘 드러납니다. 그가 7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건 바로 전임자인 6대 참모총장 이종찬 장군이 이승만의 계엄령 포고와 군동원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표명한 유명한 훈령을 내걸면서 최고 권력자인 이승만의 눈 밖에 나서 해임되고서 임명된 후임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인사권자에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던 전임자 이종찬의 후임으로 백선엽이 선택된 게 무슨 의미였을까요?
그 자신의 회고록에는 첫 참모총장 발탁의 의미가 뭔지 자세히 나와 있진 않지만, 후세의 역사가들이 이 대목을 긍정적으로 써줄지는 심히 의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이승만에게 언제나 ‘예스맨’이었고 그 덕분에 최초의 육군 대장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당시 한국군의 온갖 구조적 모순에 대해서 대통령에게 제대로 건의하거나 시정을 취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고 이후 그가 군내 젊은 장교단에 의해 파벌의 수장 혹은 적폐로 비판받는 주된 원인이 됩니다. 거기에 더해 백씨의 회고록을 보면 그는 미군 지휘관들과 매우 좋은 관계를 형성하며 그들의 도움과 신뢰를 독차지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그게 다르게 보면 미군의 입맛과 기호를 알아서 잘 맞추는 처세이자 그의 출세비결은 아니었을까요?
한국전쟁 초기 모든 주력부대가 궤멸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1주일이나 한강방어선을 지켜냈던 시흥지구 전투사령부(후일 우리 육군의 1군단의 모체가 됨)을 이끌었던 독립군 출신의 김홍일 중장 같은 유능하고 노련한 지휘관들은 미군에게 입바른 소리 혹은 독자적인 지휘권을 놓고 대립하거나 직언을 하다 해임되거나 한직으로 좌천되었던 무수한 사례는 어찌 해석하고 설명해야 할까요?
요컨대 당시 한반도의 미군은 우리 군내에서 김홍일이나 안춘생처럼 독립군 경력을 가지고 있거나 김석원처럼 전투경험이 풍부한 지휘관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며 이형근 정일권 백선엽과 같은 눈치 빠르고 순종적인 인물들을 중용하라고 이승만 행정부에 입김을 넣은 당사자가 미군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백선엽이 미군이나 이승만의 비위나 심기를 단 한 번이라도 건드렸다면 그가 그 화려한 위치에 설 수 있었겠는가는 질문에 백씨는 ‘나도 때론 할 말은 했다’ 라며 단호하게 부정할 수 있을까요? 이제부터 그에 대한 평가가 시작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음편에는 군 경력이후의 그의 해바라기 행적과 친일부역 경력을 다뤄보겠습니다.
백선엽에 대한 평가는 이제부터다 (중)
- 해바라기 인생의 뒤안길엔 성찰이나 진정성의 향기가 없었다 -
성공(?)한 군인 백선엽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도 내내 승승장구했고 높은 분들의 이쁨을 듬뿍 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평안도 군벌이라는 인맥을 형성했고 끼리끼리 밀어주고 당겨주는 우리 군대 내 뿌리 깊은 병폐를 만든 장본인이었습니다. 오죽하면 김종필 이하 육사 8기들이 그 병폐를 지적하며 군사반란의 명분을 잡으려 들었겠습니까?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만주군관 학교와 일본 육사 출신들이 대거 우리 육군에서 핵심 주체로 자리 잡는 데 백씨는 그들의 든든한 대부 격의 역할을 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이 혜택을 본 이가 바로 박정희지요.
숙군 시기 박정희의 구명 과정에서 마치 혼자서 박을 위해 애쓴 것처럼 서술하는 백씨의 주장들을 보면 역시나 탁월한 처세의 달인답다는 감탄마저 나옵니다. 일본군 소좌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참모총장 재직 시 육사 교장에 안중근 의사의 조카이자 독립군 출신의 안춘생 장군을 발탁했던 이종찬 장군의 행적과는 너무도 대조됩니다.
백선엽이 고작 마흔 안팎의 매우 젊은 나이에 군에서 전역한 시기도 4.19혁명이 일어난 그해 5월 말이었던 걸 보면 그는 이승만 시대를 상징하는 구시대 인물이었습니다. 아마도 해방 후 고향인 평안도에 그냥 남았다간 친일부역의 경력 때문에 온전하지 못할 것을 직감하고 월남해서 군입대를 선택했던 것처럼 그는 언제나 변화하는 시대에서 생존본능과 감각이 돋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출세지향의, 지조 없으며, 눈치 백단의 인사가 우리 군대의 창군 주역이자 최초의 사성장군이었으니, 과연 우리 군이 이후 어떤 것을 모토로 삼고 무엇을 전범으로 삼게 되었을지 한번은 의문을 가져야 정상 아닐까요?
실정이 이런 데도 백씨가 우리 군에서 선순환의 구실을 했을 거라고 보십니까? 그런 인사가 가장 높은 자리의 군 원로라는 사실 자체가 정말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헌정사에서 이승만이라는 한번 잘못 끼운 첫 단추가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독재 권력을 잉태했음을 상기한다면 우리 군이 외형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늘 정신적인 빈곤과 정통성이나 정체성의 혼돈을 내재하고 있는 이유가 저는 백씨로 상징되는 친일부역 황군이라는 더러운 뿌리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이제라도 제2의 창군과 독립군과 광복군의 전통을 계승하는 새로운 시민사회와 국가에 맞는 현대적인 군의 위상 정립이 시급합니다. 과연 이런 시대의 열망과 흐름에서 백선엽은 어디쯤 위치해야 맞을까요? 지금 같은 최고 예우를 받는 원로의 위치는 당연히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에 대한 재평가 논의와 그의 치부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 제기는 정의로움과 민족 정통성을 중시하는,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과 민주주의와 열린 사회를 지향하는 우리 사회의 내부 동력이 지속하는 한, 절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며 군을 떠날 수밖에 없었음에도, 백선엽의 해바라기 지향적 삶은 여전히 탄탄대로였습니다. 곧바로 외교관으로 변신해 주요국가의 대사를 역임했으니까요. 사실 이 과정도 얼마지 않아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에게는 군내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진 백선엽을 견제하는 측면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의 세월을 백선엽은 특유의 친화력과 박정희에 대해 적개심이 없음을 내보이며 돌파, 10년 만에 귀국해 교통부 장관을 시작으로 1980년 박정희 정권이 끝나는 순간까지 알짜배기 국영기업의 사장직을 역임하며 시쳇말로 ‘꿀 빠는 세월’을 보냅니다. 물론 그와 비슷했던 입장이었던 정일권만큼 총리나 국회의장 같은 엄청난 권세를 누리진 못했지만, 이후 약 40년간 군의 원로이자 창군의 주역이며 한국전쟁의 영웅으로까지 격상되면서 한때는 원수추대 논의가 나올 정도로 안온하고 행복하며 빛나는(?) 여생을 살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러하듯이 사람이 살다 보면 공이나 과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지금 백선엽을 평가 절하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100년, 1세기나 되는 긴 시간을 살았음에도 이 인간의 내면에는 출세지향, 양지만을 찾아다니는 능란한 처세만 있을 뿐, 과에 대한 그 어떤 성찰이나 죄송스러움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일본군 출신이지만, 해방이 되기 전부터 일제의 작위 세습을 거부하고 해방 후엔 3년간 초야에 묻혀서 자숙하는 삶을 살았으며 늘 친일부역의 집안 내력과 자신의 황군 경력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살았던 이종찬의 생애와 대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승만의 실정과 폭주가 지속되자, 미국은 ‘상비작전’이라는 이름하에 군부의 쿠데타를 준비했고 이 과정에서 군의 정치개입을 가장 앞장서서 막아내 군에서 가장 신망이 높았던 이종찬 장군을 내세우려 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소령과 이용문 장군이 가장 앞장서서 이종찬을 설득했지만, 이종찬 장군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이보게, 우린 한때 왜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부끄러운 경력이 있는 몸들일세, 아무리 실정을 하고 있다고 한들 이 박사는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이 아닌가? 그런 사람을 흠결이 있는 우리가 쫓아내서 역사에 또 한 번 오명을 남기는 일은 삼가야 하지 않겠나?”
제가 지적하고 싶은 대목은 바로 이런 측면입니다.
백씨가 만주군에 자진 입문하고 간도 특설대애서 못된 짓을 한 것 자체도 문제지만 이후 그의 생애에서 그가 진지하게 이 치부와 추문을 얼마나 진정성 있게 돌아봤느냐 하는 대목인데 그의 기나긴 백 년의 삶에서 그런 대목이 있기나 한 걸까요? 그는 긴 시간 내내 충분히 자기 입장을 보여줬질 않습니까? 그렇다면 평가는 객관적이어야죠.
지금까지 출간된 그 어떤 백선엽의 저서나 말이나 언론 인터뷰를 보더라도 자신의 인생의 치부가 되는 친일 부역 만주 특설대 활동 대목에 대한 미안함이나 진심 어린 성찰이나 반성은 없습니다. 늘 애써 축소해서 말하거나 회피하기 일쑤죠. 그러다 보니 한국전쟁 시 백야전사의 공비토벌 대목에서도 한 점 부끄럼이 없이 민간인을 보호했다고 힘주어 강조했지만, 그의 부대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넘겨진 포로 중에는 상당수 지리산 거주 민간인들이 그대로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니, 그 긴 생애 동안 이러한 과오나 오류를 수정하거나 성찰하는 시간이 부족했을까요? 한 2백 년 사셨으면 가능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합니다. 하지만 속죄할 기회와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를 회피하거나 외면하며 어설픈 변명과 무시로 일관하는 전형적인 삶이 바로 백선엽의 생애였습니다. 그는 한국전쟁으로 큰 영광과 후광을 얻었음에도 자신의 휘하에서 헌신했던 부하들에게도 무심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5천 개가 넘는 한국 전쟁 시 무공훈장이 국방부에 주인을 못 찾아 그냥 쌓여 있는데도, 그 긴 생애 내내 이를 외면했을까요?
남북전쟁 최대의 격전이었던 게티스버그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던 버지니아 사단의 지휘관 조지 피켓 장군은 전후 남은 생애 내내 그 싸움에서 전사한 부하들의 미망인과 자식과 부모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고개 숙여 사죄와 위로를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그런 무모한 명령을 내렸던 총사령관 리를 평생 용서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태평양전쟁의 영웅인 니미츠는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알링턴 국립묘지를 마다하고 태평양 전선에서 전사한 수병과 해병들이 가장 많은 샌프란시스코 인근 골든게이트 국립묘지에 부하들과 함께 하기를 유언했습니다.
이쯤에서 묻습니다. 평생 양지를 지향하며 해바라기의 삶을 살았던 백선엽의 인생에서 과연 자라나는 미래의 우리 아이들에게 뭘 보고 배워야 하는 게 있는 걸까요?
진심 민망합니다. 이런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마지막 하편에서는 미국이 백선엽을 그토록 높이 평가하고 사랑하는 진짜 이유를 톺아봅니다.
백선엽에 대한 평가는 이제부터다 (하)
- 미국이 그를 유독 사랑하고 아꼈던 진짜 이유 -
한국전쟁 기간 내내 인민군과 중국군을 비롯한 상대는 물론 동맹군인 미군에게서 조차 전혀 인정을 받지 못했던, 아니 전쟁 당사국 중 가장 만만한 호구 취급을 받았던 한국군, 특히나 한국군 지휘관들(거의 쇼와 황군 출신들이나 만주군관 학교 떨거지들)이었지만, 유독 미군의 백선엽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호의적이고 예외적일 만큼 대단히 높습니다. 아주 대놓고 키워주고 세워준 대목이 한둘이 아니지요. 특히 이러한 현상은 그가 공직에서 물러나 노년기에 접어든 지난 40년간 아주 두드러졌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점이 매우 중요한 대목이고 눈여겨봐야 할 대목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는지 그리고 이 밑바닥엔 무엇이 깔려 있는지 이젠 짚어야 합니다.
최근 들어 미국의 백선엽에 대한, 후한 평가를 근거로 들어 그를 점점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격상하고 심지어 최초의 한국군 원수로 추대하자는 국내 움직임마저 있었죠. 지금도 1야당은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고인의 빈소에 조문을 가야 한답니다. 야당 원내총무는 동작동 국립묘지에 자리를 억지로라도 만들어 한국전의 영웅(?)을 높이(대체 여기서 얼마나 더?) 모시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백선엽의 빛나는 출세와 그를 전설(?)로 만드는 데 앞장선 미국의 진짜 의도는 바로 백선엽과 같은 부류가 자신들이 원하는 한국군 지휘관이라는 냉엄한 자국 이익의 논리가 깔려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기실 한국전쟁 기간 내내 미군은 풍부한 실전경험과 대규모 야전부대를 지휘한 경력이 있는 독립군 출신의 국군지휘관들을 의식적으로 경원시하거나 문제를 일으킨다는 이유로 한직으로 내몰곤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서울을 점령당하고 완전히 궤멸된 육군의 잔존병력을 긁어모아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를 구성하고 무려 1주일이나 한강의 방어선을 사수해내 사실상 한국전쟁의 큰 흐름을 바꿨던 김홍일 장군이 그렇습니다.
중국 정규군의 장군이기도 했던 김홍일 장군은 크나큰 공을 세웠음에도 이후 다시는 일선에서 지휘를 해보지 못한 반면, 아직 30대 중반도 안된 새파란, 고작해야 중대나 대대를 통솔했어야 할 백선엽과 정일권 같은 이들이 군의 총사령관이나 참모총장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중용되었던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이나 미군의 본심이나 의도는 무엇일까요.
까놓고 말해서 그들은 한국군이 독자적이고 자주적으로 움직이는 자체를 원하지 않았다고 봐야 합니다. 미국이 시종일관 임시정부를 멀리한 것과 다를 바 없는 맥락이었지요.
이러니, 군 인사에서 자기들 말을 더 잘 듣고, 신분상의 핸디캡으로 더 고분고분한 일본 육사 출신이나 만군 학교 출신들을 더 편하게 여겼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겠지요.
미국의 입장에서 미군의 이러한 행동이 자국국익의 극대화에 최적화된 행동임을 고려하면, 반대로 우리의 국익과 우리 민족의 이해에는 이것이 과연 어떤 선순환이나 좋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상식적으로 볼 때 일련의 상황이나 흐름들이 도저히 우리에게 득이 되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쯤에서 2차대전 후 미국이 변방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과거처럼 직접 식민지배 통치가 더는 유효하지 않게 되면서 미국은
1. 군사력 주둔
2. 경제적 수단
3. 해당 국가 국민을 광적인 무지몽매한 다수(Folie en masse) 만들기 같은 간접수단을 씁니다.
1번이나 2번은 너무도 잘 아시겠지만 바로 3번 같은 경우가 지금의 ‘백선엽 치켜세우기’에 해당합니다.
2010년에 공개된 미군 기밀문서를 보면, 백선엽에 대한 인간적인 평가는 저들의 립 서비스와는 달리 그다지 좋지 못합니다. 백씨가 다수의 부정에 연루된 구시대 인사라라는 사실을 저들도 잘 압니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그를 영웅으로 상찬하고 치켜세워서 한국전쟁의 실상을 흐리고 미국의 국익을 한반도 특히나 한국군 지휘관들에게 투사하기에는 최적의 인물임을 너무도 잘 알기에 미국은 의식적으로 백선엽을 후대하고 꾸준하게 상찬해왔습니다. 그리고 백선엽을 필두로 그와 비슷한 유형의 지휘관들을 양성하는데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지요.
그 결과 지금 한국군 지휘부에는 정상적인 국가라면 당연히 행사해야 할 가장 기초적인 전시 군 작전지휘권을 직접 행사하는 일에 심각한 두려움과 우려를 표명하는, 정말로 이상한 부류들이 차고도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몇 년 전에는 패트런인 미국이 주겠다고 하는 전작권마저 사양하고 손사래를 치는데 가장 앞장선 집단이 바로 우리 군부였습니다. 세계 10위 권 안에 드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한 선진국이 되었음에도 아직 우리 군부의 주류 지휘관들은 전작권을 환수하는 데 적극적이지 못합니다. 이게 우연일까요? 이 원인의 맨 꼭대기에 바로 백선엽이 존재합니다.
지금도 우리 군 특히 육군내에는 백선엽처럼 처신해야 별 달수 있다는 암묵적인 묵계가 존재해왔고 아직도 상존하는 게 현실입니다. 국가안보의 근간을 자주국방이 아니라 한미동맹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직업군인들이 과연 이 나라 군에 얼마나 되는 걸까요.
자주국방이나 전시작전권의 온전한 행사보다는 한미동맹이 자국 안보의 핵심이라고 인식하는 군인이야 말로 미국과 미군이 원하는 우리 군 지휘관 모습이었던 지난 70년 세월. 미국이 백선엽을 성원하고 영웅으로 상찬하는 가장 큰 이유 역시 백씨가 바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적극 지원했기 때문입니다. 부도옹 풍도처럼 그는 늘 그렇게 살면서 자신의 빛나는 해바라기 인생을 완성하고 떠난 것이죠.
따라서 백선엽은 이후 우리 군이 제대로 된 군대가 되고 온전히 자주적인 전시작전권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가장 먼저 장성의 자리는 물론 그 어떤 장교 보직에서도 반드시 제외해야 할 군인의 유형입니다.
이런 부류의 군인이 군에 있다는 사실 자체로도 나라의 국방과 안보는 크게 흔들립니다. 이제 백씨는 사망했고, 그가 남긴 유산들은 냉정한 춘추필법의 평가와 시간이라는 매우 버티기 힘든 지난한 숙성과정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분명한 건 그가 이후의 역사서술에서 지금 이 순간보다 더 높은 상찬이나 평가를 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역사에서 그 어떤 선순환이나 좋은 영향을 주지 못했던 출세지향의 기회주의 인생에게 주어진 너무도 과분한 흔적들은 조만간 세월의 파도가 싹 씻어버리고 나면 뭐가 남을까요? 간도특설대만 남겠죠.
다시는 이 민족의 역사에서 이런 군인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교훈 하나만 우뚝합니다.
추신1: 백선엽이 한국전쟁의 영웅이라고? 누가 그래?
83년 국방부가 선정한 한국전쟁 4대 영웅(김홍일, 김종오, 맥아더, 워커)에 백선엽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백선엽의 공로로 첫손에 꼽는 다부동 전투는 고작 전술적 승리이며 8분의 1에 불과하다. 당시 낙동강 전선의 크기와 중요성은 다부동 한곳만이 아니었고 전체 8개 사단 모두가 사활을 걸었던 지역이었다. 따라서 낙동강 전투의 진정한 영웅은 워커 장군이다. 전술적 승리와 전략적 승리를 구분하지 못하면 즉시 바보가 된다.
추신2: 진실이 빛에 바래면 거짓 신화가 만들어진다.
80년대와 90년대에 들어와 한국전 관련 대부분의 관련 당사자들이 자연사해가자, 백선엽의 영웅신화가 나왔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백씨가 90년대 들어 사실상 유일한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생존자가 되면서부터 다부동 전투가 급부상했고 그는 이후 자기 자신을 신화화하는 데 적극적으로 각종 한국전쟁사 모임들을 활용했다. 그의 독단에 반론할 증언자들이 모두 사라지자 나타난 현상이다.
이래서 한국전쟁에 대한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연구가 시급하며 특히나 실패와 패전에 대한 집중적인 분석이 중요하다. 한국전쟁은 명백히 실패한 전쟁이며 이런 수치스러운 기록에 대해서 전쟁영웅을 운운하는 것도 사실 우스운 일이다. 브래들리 원수같은 2차대전의 영웅이 왜 한국전쟁은 모든 게 잘못되었다고 혹평했겠는가.
추신3: 간도특설대에 대한 일본군 장교 출신들의 흥미로운 언급
최근 들어 이한림 장군등 일본군 출신 장교들의 회고록 내용 중 이런 서술들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간도 특설대에 대한 부분. 비록 본의 아니게 친일부역하기는 했으나 간도특설대와 같은 악랄한 조직에 일부러 몸을 담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변명들이 나온다.
친일부역자들조차 기피하는 곳이 바로 간도특설대였다는데 여기 자진해 몸담은 백선엽은 뭐라고 봐야 할까. 굳이 더 이상의 서술이나 논쟁이 필요치 않다고 본다. 그자는 반성이 전무한 인생을 살았고 그만큼의 댓가를 반드시 치르게 될 것이다. 범옹 신숙주가 조선 후기에 들어 최악의 간신배에 올랐던 만큼이나 백씨에 대한 평가는 갈수록 급전직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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