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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삼한통일(三韓統一)’에 관한 이야기 [유종성 지방분권포럼 대표]

뉴잭스윙 선비 2025. 2. 16. 13:19

우리 고대사는 독립투사 역사관으로 다시 써야 한다.
삼한의 범위는 만주와 한반도를 포함하는 ‘방4천리’
삼국인들은 처음부터 삼한=삼국으로 이해
후기신라 지방민들은 남북국의 분열로 인식

최근 일각에서 잘못된 전제를 바탕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며 마치 중국 동북공정의 논리를 뒷받침해 주는 듯한 인상을 주는 주장들이 간간히 들려오고 있다.

신라의 삼한통일의식이 발현된 것은 신라의 지배질서가 이완되어 분열의 조짐이 보이던 9세기경 통합이념으로서 천명되었고, 삼국을 삼한으로 인식한 것은 인류학 보고서에 기반한 7세기 당인(唐人)들의 편의적인 분류에 불과하며, 신-당간에 밀약한 '평양이남(平壤已南) 백제토지(百濟土地)'는 평양이남이 백제토지라는 의미로 해석되니 신라의 최종목표는 백제통합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또한 신라가 고구려 고토를 방기하고 발해 건국에 대하여 무관심했던 것을 볼때 신라인의 삼한 개념에는 고구려가 배제되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따라서 신라인이 언급한 삼한통일은 삼국통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중남부의 삼한 즉 신라.백제.가야를 통합한 것을 염두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주장들이 사실일까? 1차사료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모화사대사관과 일제식민사관에 함몰된 근현대 사학자들의 선입견에 기반한 잘못된 "한반도 중남부 삼한설"에 입각하여 억설을 펼친 결과 당대성을 결여한 엉뚱한 결론들이 도출된 것이다.

<삼국지>와 <후한서>에서 한(韓=삼한)의 면적이 만주와 한반도 전체를 포함한 '방4천리(方四千里)'라고 분명하게 적시하고 있다.

이 사서를 공유한 전근대 동아시아 한중일 사람들은 우리나라 삼국을 통칭하여 모두 '삼한(三韓)'으로 불렀다. 삼한의 기원은 이미 고조선대부터 확인된다. <잠부론(潛夫論)>에는 고조선의 이칭이 "한(韓)"이였던 것을 알려준다.

'한(韓)의 서쪽에도 역시 성(姓)을 한(韓)이라고 하였는데 위만에게 공파당하여 해중(海中)에 가서 살았다'는 기록이다. 한(韓)의 서쪽에 있던, 한을 성(姓)으로 삼은 세력은 기자의 후예로 등장하는 준왕을 의미하는 바, 고조선 전체가 이미 "한(韓)"으로도 불린 것이다.

또한 고조선의 서변(西邊)에 있던 기자조선의 지배자를 <사기>에서는 "조선후(朝鮮侯)"라 하고 <시경(詩經)>에선 "한후(韓侯)"라고 기록한다.

두 기록도 역시 조선이 곧 한(韓)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고조선의 강역은 여러 선학들의 연구에 따르면 만주와 한반도이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한의 면적 ‘방4천리’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따라서 기존의 "한반도 중남부 삼한설"은 고조선과 삼한의 변화 과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오류로부터 출발한 주장으로써 이미 단재선생의 '전후삼한설(前後三韓說)', 윤내현의 '대고조선설(大古朝鮮說)', 서의식의 '진국체제설(辰國體制說)'과 같은 정밀한 학설을 통해 논파되었다. 하지만 구각을 걷어내지 못하고 있는 강단학계가 죽은 아이 뭐 만지는 격으로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하며 중국 동북공정의 빌미를 제공하고 대중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진한6국의 연합으로 세워진 신라의 선대가 ‘조선유민(朝鮮遺民)’이라고 한다. <삼국지>는 ‘진한은 옛 진국(古之辰國)으로서 북방에서 이주한 세력이라’ 하고, <후한서>는 ‘삼한이 모두 옛 진국이라’고 한다. 이 기록들을 종합하면 방4천리 강역을 지닌 삼한의 전신이 진국이고 이 진국은 고조선에서 나왔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고조선->진국->삼한->삼국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 경험을 고구려, 백제와 더불어 공유했던 신라인들은 처음부터 “삼한”을 “삼국”에 대응하는 이칭으로 삼았던 것이다. 따라서 신라인이 운운한 “삼한일통(三韓一統)”은 고구려를 포함한 “삼국통일(三國統一)”을 의미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은 이를 증명한다. "17세 수행중에 있는 유신을 보고 어떤 노인이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삼국을 통일한 뜻을 가지고 있으니 참으로 장하다'고"하면서 유신의 꿈이 삼국통일에 있음을 보여준다. 후에 유신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당전쟁을 치루는 과정에서 문무왕에게 “삼한이 한 집안이 됐다”고 아뢰고 있다.

문무왕은 부왕을 회고하면서 삼국사기 동왕9년(669) 기사에 삼국통일을 분명하게 밝힌다. "선왕(先王 무열왕)께서는...바다를 건너 입조(入朝)해서 당나라 조정에 군대를 청하셨다.

이는 본래 두 나라를 평정하여 영원히 싸움이 없게 하고, 여러 대(代)에 걸친 깊은 원한을 설욕하며, 백성들의 남은 목숨을 온전히 하려는 것이었다.

〔선왕께서〕 백제는 비록 평정하셨지만 고구려는 아직 멸망시키지 않았는데, 과인이 적을 무찔러 나라를 안정되게 하려던 유업(遺業)을 이어받아 마침내 선왕의 뜻을 이루어냈다. 지금 두 적이 이미 평정되어 사방이 조용하고 편안하다"라고 밝힌다.

또 문무왕은 <삼국사기> 동왕21년(681) 기사에 "과인은 어지러운 운을 타고 태어나 전쟁의 시대를 만났다. 서쪽(=백제)을 정벌하고 북쪽(=고구려)을 토벌하여 영토를 평정했다"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잡지 제사에서는 '태종대왕(太宗大王)·문무대왕(文武大王)은 백제(百濟), 고구려(高句麗)를 평정한 큰 덕이 있다고 하여 모두 대대로 헐지 못하는 신주로 삼고'라고 한다.

혹자는 <삼국사기>가 12세기 고려시대 기록임을 내세워 7세기 중대신라인들의 인식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으나 김부식은 유학자였기에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원칙 하에 누대로부터 전승 된 고기(古記)와 같은 사료들을 그대로 저록하였다. 따라서 김유신을 만난 노인과 문무왕과 김유신의 삼국통일 인식은 7세기 중대신라인의 인식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삼한통일 인식은 9세기 하대신라인에게도 그대로 이어졌으니 김입지는 성주사비에서 ‘예전에 한(韓)이 솥발처럼 대립했을 때 백제에서 신라의 왕태자에게 (무언가를) 바쳐서’라고 하며, 최치원도 봉암사 지증대사탑비에서 ‘옛날 우리나라가 셋으로 나뉘어 솥발과 같이 서로 대치하였을 때 백제에 소도의 의식이 있었는데 이는 감천궁(甘泉宮)에서 금인(金人)을 제사지내는 것과 같았다 그 뒤 서안의 담시가 맥(貊 고구려)땅에 들어온 것은...옛날에 조그맣던 삼국이 이제 크게 한집이 됐다’라고 한다.

두 신라인은 “한(韓)” 즉 “삼한”을 운운하면서 곧 신라와 더불어 고구려, 백제를 함께 언급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주목되는건 삼국 모두를 신라인이 우리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 최치원은 당나라 태사시중에게 보낸 글에서 ‘마한은 고구려이고, 변한은 백제이며, 진한은 신라이다’라고 한다. 각각의 삼한을 삼국으로 등치시킨 것이 사실에 부합되느냐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일단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삼한의 범주에 고구려를 분명하게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라인들이 삼국통일을 달성한 통일군주로 태종무열왕을 내세운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월광사 원랑선사탑비에는 ‘태종대왕께서 (중략) 삼한에서 전쟁을 그치게 하고 통일을 달성하신 때에...’, 최치원이 당나라 태사시중에게 올리는 글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3백여 년 동안 한 지방이 무사하고 창해가 편안한 것은 바로 우리 무열대왕의 공이라고 할 것이다’

<삼국사기> 신문왕 12년 기록에는 ‘태종무열왕이 삼한을 통일했다’, ​​<삼국유사> 태종 춘추공에서는 ‘태종 무열왕이 김유신과 함께 삼한을 통일했다’ <삼국사기> 신문왕 12년 기록에는 왕이 당의 사신에게 ‘무열왕은 삼한을 통일한 공적이 크기에 태종이라는 묘호를 올렸다’, 성주사 낭혜화상탑비에 ‘선조(무열왕)께서는 고구려와 백제라는 두 적국을 평정하여’라고 한다.

혹자는 신라인들이 무열왕을 통일군주로 내세운 것은 신라의 최종 목표가 백제통합에 있었기에 그렇게 인식했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무열왕은 “신당동맹(新唐同盟)”을 성사시켜 백제를 병합하고 아들 문무왕대 고구려를 붕괴시켜 그 자산을 흡수할 수 있도록 “통일의 초석”을 놓은 제왕이였다.

문무왕이 삼국통일의 대업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도 무열왕의 유지(遺志)에 따른 것이였다. 이 사실은 문무왕의 회고를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삼국사기> 문무왕9년 2월21일 '〔선왕께서〕 백제는 비록 평정하셨지만 고구려는 아직 멸망시키지 않았는데, 과인이 적을 무찔러 나라를 안정되게 하려던 유업(遺業)을 이어받아 마침내 선왕의 뜻을 이루어 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무열왕의 삼국통일 의지가 그의 아들 문무왕을 통해 연속 실행된 것으로 보았기에 “통일군주=무열왕”이라는 논리가 성립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출신 군주로서 중대왕실을 개창한 중흥시조였기에 무열왕계(武烈王系)는 그의 위상을 높힐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통일군주=무열왕”이라는 상징성을 부여하였고 후대왕들은 그 후광을 힘입어 권위와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했다. 이러한 무열왕계의 정치적 의도를 읽어내지 못하고 단순히 “통일군주=무열왕”이라는 기록만을 가지고 삼국통일을 부정하려 드는 것은 정밀한 분석이라 할 수 없다.

또 혹자는 신‧당간에 밀약으로 확정된 '패강이남 백제토지(浿江已南 百濟土地)'라는 영토조항을 가지고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려고 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신라가 패강이남만을 최종 목표로 삼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어 당(唐)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였다. 그래서 신라는 당에 대해 저자세를 취하며 일방적으로 당의 제안을 수용하였다.

백제를 멸한 이후 당이 처음의 약속과는 다르게 백제고지를 신라에게 돌려주지 않고 관부를 설치하여 점령을 이어가려하고 신라마져 일개 주(州)로 편입하려고 조치를 취하는 등 온갖 수모를 가할 때에도 신라는 고구려를 멸할 때까지 전략적으로 인내했다.

668년 고구려가 붕괴되자 신라는 적극적으로 당군을 공격하며 백제고지 회수에 나서는 한편 고구려부흥군을 지원하면서 신당전쟁을 개시하였다. 이 당시 신라는 신라군뿐만 아니라 옛 고구려, 백제인과 말갈인들까지 규합한 “통일신라군(統一新羅軍)”을 조직하여 요동에까지 진출하여 작전을 수행했다.

이것은 바로 신라가 당과 맺은 '패강이남 백제토지' 밀약에 구애받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패강이남 백제토지(浿江已南 百濟土地)'는 실상 패강이남의 고구려땅과 백제고지로 해석되어야 마땅하기에 신라의 최종목표가 결코 백제통합만을 삼은 것이 아니였다.

최근 고구려의 수도 평양이 북한의 평양이 아니라 요양이라는 연구결과가 있고보면 패강이 오늘날 대동강이 아니라 요동에 있는 하천일 수 있는 것이다. 설령 기존의 통설대로 패강이 대동강이라고 하더라도 신라는 상대(上代) 진흥왕때부터 시작하여 중대 시기까지 고구려땅 절반가량을 점차적으로 점령해 나갔다.

김춘추가 연개소문을 만나 원병을 청할때 고구려측에서 죽령이북은 우리의 땅이니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죽령(竹嶺)은 경북영주와 충북단양 사이에 있는 고개이니 충북에서부터 그 이북지역은 원래 고구려땅이였고 그곳에 민인(民人)은 고구려인들이였다.

강경구의 연구에 따르면 고구려멸망 직후 평양일대는 김유신 가문의 영지가 되었고, 점차로 후기신라의 강역이 대동강을 넘어 현)압록강에 이르러 패서도(浿西道)가 설치되고 향수제(鄕戍制)로 다스려졌다고 한다.

동북계는 함경남도에까지 이르렀다는 일각의 연구성과도 있고보면 신라가 처음부터 고구려 고토를 방기했다는 주장은 다시 고려해 보아야 한다.

또한 혹자는 당이 삼한을 평정하여 점유한 것처럼 실려있는 당측 입장의 기록을 가지고, 우리가 삼한=삼국을 내세우면 중국의 동북공정에 이용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한다.

쌍계사 진감선사탑비에는 ‘성스러운 당나라가 사군(四郡)을 차지했다’, 천남생 묘지명에 ‘오부(五部) 삼한(三韓)이 모두 당의 신첩(臣妾)이 됐다’는 기록 등이다.

그러나 실제로 당은 백제와 고구려 고지를 오래 점유하지 못했다. 당이 백제와 고구려를 붕괴시키고 그 유민 일부를 포로로 잡아갔던 사실을 과장하여 마치 그 고지를 점유한 것처럼 선전했을 뿐이다.

고구려, 백제유민의 묘지명에서도 당의 입장을 그대로 표현한 부분이 등장하나 그 묘주(墓主)가 당에 귀화 혹은 포로 후에 당에서 출세하여 그 일원이 된 자신들의 처지를 감안하여 당의 입장을 그대로 서술해 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고구려고지는 고작 요서 요동일대 일부 구간만 잠시 당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었고, 고구려부흥운동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당은 사실상 압록강이남과 동만주 일대를 방기할 수 밖에 없었다. 백제고지도 백제의 왕자를 웅진도독으로 내세워 지배하려 했으나 각지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기에 그 점유가 온전할 수 없었다.

사실상 668년 고구려가 망하고 698년 발해가 세워지기까지 당시 만주와 한반도에 정통왕조는 신라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30년 기간은 명실상부하게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였다.

신문왕 때 옛삼국의 고토에 각각 세 개의 주(州)를 설치하여 삼국통일의 완성을 외형적으로 과시하였고, “9주”는 천자가 통치하는 범위를 의미하기도 하니 신라가 독자적인 천하관을 표방한 것이기도 하다.

이 시기 동안 어느 때보다도 신라인들 스스로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하는 의식으로 충만했다. ‘방4천리’ 만주와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던 옛 진국(삼한)의 영광을 회복하려던 신라인들의 오랜 염원이 성취된 일이었다.

그러나 698년 만주의 고구려 고지에 대진국(大振國) 발해(渤海)가 세워짐으로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가 전개되어 삼한통일은 깨어지고 말았다. 이 사실을 당시 신라인들도 잘알고 있었다. 〈최치원이 예부에서 상서를 맡고 있는 배찬에게 올린 글〉에서 ‘옛날의 고구려가 지금의 발해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헌강왕이 당나라 강서에 사는 대부 직함을 가진 고상에게 보낸 글>에서 ‘예전의 고구려는 오늘날 발해가 됐다’고 한다. 〈최치원이 당나라 태사시중에게 올린 글〉에서 ‘고구려의 잔당이 북쪽에 있는 태백산 아래에 모여서 국호를 발해라고 했다’고 한다.

〈발해가 (당나라가 마련한 외교석상에서) 신라보다 상석(上席)에 앉지 못하도록 당 황제가 조치한 것에 대해 감사하여 효공왕이 올린 표문〉에서 ‘신이 삼가 발해의 원류를 살펴보건대, 고구려가 멸망하기 이전에 속말소번이 있어 (중략) 선천 2년(713년)에 발해군왕(渤海郡王)에 봉해지게 되었습니다’라고 언급한다.

 


이러한 대진(大振 발해)의 등장으로 삼한통일이 무색해지는 분열의 상황에서 경주중심의 신라지배층은 이중적인 인식을 통해 현실에서 안주하려고 했다. 6두품 출신의 최치원과 같은 엘리트들은 대진을 고구려 부흥국으로 인정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대진의 말갈적 요소를 크게 부각시켜 이적시(夷狄視)하면서 의도적으로 그 존재를 무시했다.

그리고 당시 신라는 당의 견제와 국력의 한계로 인해 사실상 만주의 고구려고토를 자기질서 속에 다 포함시킬 수 없었다.

그리고 예전 삼국시기처럼 남북국간에 대대적인 전쟁을 계속할 경우 자칫 당의 이이제이(以夷制夷)에 말려들어 양국의 국력이 소모된다면 당의 침략을 받아 국가존망의 위기에 놓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신당전쟁을 한차례 치룬 경험을 지닌 신라 지배층의 입장에서 신라와 당 사이에 놓인 대진이라는 존재는 당의 직접적인 위협을 피하는 완충역할로써 유용하였고, 당이 대진을 배후에서 견제한다면 그 위협도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는 계산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역학관계를 감안하여 경주 중심의 신라 엘리트층은 남북국의 분열이라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면서 7세기 삼국통일을 하나의 통합이념으로써 계속 활용하려는 차원에서 “삼한일통”을 계속 운운하며 선전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라 지방민들의 인식은 경주중심의 지배층들과는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주(漢州), 삭주(朔州), 명주(溟州)와 2도(二道)의 옛고구려 고지와 그곳의 다수 민인들은 당시의 상황을 확실하게 삼한통일이 깨어진 남북국의 분열로 인식하고 있었고 언젠가는 통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후기신라 사람중 한 명인 송악의 호족 왕륭이 궁예(弓裔)에게 귀부하면서 ‘대왕께서 만약 조선(朝鮮)·숙신(肅愼)·변한(卞韓)의 땅에서 왕이 되고자 하신다면 먼저 송악에 성을 쌓고 저의 장남을 그 성주로 삼는 것 만한 게 없습니다.’라고 주청한다.

여기서 조선은 요서,요동일대를, 변한은 한반도에 위치한 신라를, 숙신은 곧 동만주에 중심을 둔 발해를 상징하는 이름들이다. 왕륭(王隆)은 당시의 상황을 남북국의 분열로 이해하고 있었고 이 상황을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궁예도 별다른 이의없이 공감하며 왕륭의 제의를 기꺼이 수용했다. 후에 궁예가 북벌을 단행하여 "패서13진(浿西十三鎭)"을 설치하며 요동으로 진출하였고, 그의 정책을 계승한 태조왕건도 강력하게 북진정책을 표방하여 고토 수복과 동시에 발해유민과 여진인들의 귀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왕륭의 남북국의 분열과 재통일의 당위에 대한 인식이 후기신라 지방민들에게 널리 퍼져있던 공통의 인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실인식이 태봉(泰封)과 고려대에 와서 북진정책(北進政策)으로 수렴되었고, 계속적인 북진(北進)의 결과 고려 중기에 이르면 ‘방4천리’ 삼한의 강역을 온전히 수복하진 못했으나 서북으로는 요하선에 이르고 만주의 길림합달령을 지나 동북으로는 두만강이북700리 공험진을 경계로 하여 고구려와 대진국의 고토를 수복하게 된다.

 


참고. 대한민국역사교과서(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김유신의 평양왕국과 신라의 북방영토(강경구)
발해의 대외관계사(한규철)
신라는 정말 삼국을 통일했는가(역사비평사)
신라인은 삼국통일을 말하지 않았다(신형준)
고조선연구(윤내현)
새로 쓰는 우리고대사(서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