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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스스로의 부끄러운 DNA 폭로하다. [데일리안 박경귀의 중국 톺아보기]

뉴잭스윙 선비 2021. 8. 10. 22:05

“당신은 다음 생애에도 다시 중국인으로 태어나겠습니까?” 몇 년 전 중국 3대 포털사이트 가운데 한 곳에서 중국인 네티즌에게 설문조사를 하면서 던진 질문이다. 중간 투표 결과 1만 1271명의 투표자 가운데 65.1%가 “다음 생애에는 중국인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응답했다. 중국 공산당 통치 하에서 가장 민감했던 이 조사가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자, 당국에 의해 조사가 강제로 중지되며, 관련 웹페이지가 삭제되고 이를 기획한 편집자들이 해고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다시는 중국인으로 태어나지 않겠다>라는 도발적인 이 책의 제목은 저자 종주캉의 외침이 아니라, 바로 응답 네티즌 65% 중국인의 절규를 대변하는 셈이다. 대부분의 현세의 중국인이 중국인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한 이유가 이 책에 담겨있다. 이 책은 출간 즉시 중국 공산당에 의해 ‘1급 금서(禁書)’로 지정될 만큼 중국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홍콩 태생의 중국인인 저자 종주캉(鍾祖康)은 중국인의 저열한 민족성과 중국 사회문화의 허위의 가면 뒤에 감춰진 부끄러운 민낯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종주캉의 의도는 분명하다. 중국인이 철저하게 자신의 폐습과 치부를 성찰하지 않고서는 중국사회가 진정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없을 것이라는 관점이 깔려 있다. 이 책을 통해 외국의 독자들은 막연하게 알고 있던, 그리고 국외자의 입장에서 차마 알고도 비판하기 어려운 중국인과 중국 사회의 곪은 모습과 민망하게 마주하면서, 중국인의 자성과 혁신을 요구하는 저자의 간절한 절규를 읽게 된다. 이 책이 수많은 중국인에게 열렬한 지지와 광적을 비난을 동시에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가 보는 중국인의 악행과 고약한 습성은 다양하다. 가래침을 아무 데나 뱉는 더럽고 몰상식한 행동도 오랜 전통의 하나이다. 오죽하면 이백(李白)의 시에서조차 침 뱉는 행위를 교묘하게 미화하지 않았나? 상대방을 보아가면서 처신하는 중국인의 기회주의적 태도도 보편적이다. 상대방의 인종, 신분, 권력, 재산 등을 세심하게 고려해서 때때로 다른 처세를 보인다. 저자가 중국인이 마음속에 불변의 양심이나 보편적 도덕 기준, 합리적인 행동기준이 없는 ‘기회주의 집단의 노예’라고 비판하는 근거다.

중국인들은 거의 다 무신론자이고,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허풍과 날조에 능숙하다. 중국인들이 조화를 좋아하고 중용을 지키며, 우아하고 고상하다는 생각은 완전한 착각이라는 얘기다.

종주캉은 중국인이 관상과 운명을 맹신하게 된 화근의 하나로 “군자는 정신노동을 하고, 소인은 육체노동을 한다(君子勞心 小人勞力)”는 공자의 언명을 든다. 주어진 신분에 따른 직분을 다하도록 요구하는 이런 사고가 자신의 능력을 펼칠 도전적 생각을 억압시키고, 관상학과 역술에 의지하는 무기력한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보는 듯하다. 보통 사람들과 ‘나쁜 관상’을 가진 사람들이 냉대를 받고 자신의 재주를 펼치지 못하는 기형적 상황이 중국 역사에서 지속되고 있음을, 청조(淸朝)의 증국번(曾國藩)의 인물 채용법이나, 중국 공산당이 개인의 계급 성분으로 인간을 분류하고 운명을 결정하는 방식을 예시로 든다.

저자는 중국인이 잔꾀와 권모술수에 능하다고 비난한다. 장생불로(長生不老)하기 위해 인체에 치명적인 납과 수은을 이용한 연단술이 고대부터 비전(秘傳)되어왔고, 생산도구는 물론, 식기구, 술잔 등에 납이 다량 함유된 청동기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납 성분의 유약으로 제조된 유약 도자기도 널리 활용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광범위한 납 사용 문화는 대중의 지능 발전을 저해시켜 순종하게 만들려는 우민정책의 일환이었다고 질타한다.

중국의 급격한 경제성장의 이면에 숨은 조악한 짝퉁, 각종 환경 오염물질, 인체의 건강을 해치는 유해 식품과 공산품의 유통은 거의 ‘재난’ 수준이라고 개탄한다. 저자는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사람을 중시하지 않는 중국의 문화에 기인한다고 본다. 더구나 중국 공산당이 인성가치와 이상주의를 훼손시켰기 때문에 기만하고 빼앗고 속이는 못된 습성이 양심의 거리낌 없이 저질러지고 보편화 되었다는 얘기다.

‘10억 노예 노동자’의 생활조건도 비참하다. 대중의 복리와 퇴직 보장이 극히 부족하여 국민이 감히 소비를 못하고 과도하게 저축한다. 국가는 부유해져도 국민은 여전히 가난하다. 저자는 내수 부족의 기저에 국민의 삶과 인권을 경시하는 중국공산당 통치권력의 전체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음을 비판한다. 자유시장경제의 활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통치권력의 ‘아동적 사고능력’을 지적하면서, 국민에게 서양 문명의 보편적 가치와 영혼이 담긴 제품을 생산하는 건강한 자본주의의 정신을 가르치라고 촉구한다.

저자가 꼽는 중국 문화의 큰 특색중의 하나는 이상 문화(ideal culture)와 현실 문화(real culture)가 괴리된 허언(虛言)의 문화다. ‘교양, 예의, 위생, 질서, 도덕, 환경 등’ 중국사회가 표방하는 가치들은 모두 ‘입에 발린 말’일 뿐, 현실에서 실행되지 못하는 것들이다. 잔혹한 형벌, 광적인 살생문화, 3~4천년간의 생태환경의 파괴, 전 국토의 오염화 등은 인간을 교화하고 자연을 숭상한다는 말과 판이하게 다르게 구현된 냉혹한 현실이다. 한마디로 저자는 “중국 문화는 사기성이 농후하다”고 단언하면서, 중국의 타락의 책임은 중국 문화 자체보다 중국공산당의 기만과 위선적 문화에 있다고 본다.

중국 문명은 지속가능할까? 저자는 중국의 유구한 역사가 만든 악폐가 오히려 보편적 현대 문명에의 적응을 어렵게 하고 있다고 말한다. 유가 사상이 중국에 끼친 해악도 지적한다. 효와 대가족주의, 자손 번성의 숭상으로 인해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생태자원을 심각하게 훼손시켰다는 것이다. 황당한 발상이긴 하지만, 오죽하면 저자가 수백 년 전 중국에 흑사병이라도 발생했었더라면, 이후 중국인들의 삶이 다소 행복해지지 않았을까 상상했을까?

수천 년 동안 황하의 범람을 야기시킨 이유는 유목 생활을 하던 황하 중상류 지역에서 한족의 무절제한 벌목으로 인해 토양 유실이 극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옥했던 중국 서북부 지역의 황폐화가 중국 문명을 쇠퇴시킨 한 원인이며, 15세기 초 명조(明朝)의 정화(鄭和)가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해양으로 진출했었던 기회를 살리지 못한 것도 중국 문명의 비약적 발전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했다고 아쉬워한다.

저자는 꺼젠슝(葛劍雄) 교수가 『분열과 통일』이라는 책에서 언급했든 중국의 장기간 통일과 유럽의 장기간 분열이 16세기 이후 유럽이 중국을 능가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역설적으로 분열 속에서의 경쟁과 대립이 각국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유럽의 분열이 계몽 운동을 낳고 문명을 약진하게 만들었다는 얘기다.

저자는 이런 관점에서 중국 문명의 발전도 전국적 통일보다 분열이 더 기여했다고 본다. 춘추전국시대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이 중국의 사상과 문화의 터전을 만들어 주었고, 타이완이 떨어져 나가고, 홍콩과 마카오가 외국의 수중에 있었기에 그나마 중국의 폭정에서 벗어나 7천만명이 인권과 자유를 누리며, 더 나은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가 타이완의 독립을 지지하는 이유도 이런 문명적 통찰에 기초하는 듯하다. 하지만 분열이 문명을 발전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저자의 관점을 확장시키면, 중국 대륙의 민족적 분열까지 상상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저자가 민족자결주의에 의해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이 독립하는 완전의 ‘분열’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는 것은 역시 한족다운 인식의 한계가 아닐까?

저자는 공자의 유가사상(儒家思想)의 영향으로 인해 도덕이 종교를 대신하고 있는 중국의 현실을 개탄한다. 허례허식과 극단적 형식주의, 현세주의를 낳은 유가사상이 인류문명과 인류 행복을 위한 필수 조건인 종교를 받아들일 수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인간성으로 종교를 대신하려고 한 유가의 관점은 종교를 배척한 공산당의 이해와 맞아떨어진다. 이는 중국인이 그토록 쉽게 공산주의에 호감을 가지게 된 원인이 되었고, 중국 사상이 2천년동안 유가에 독점 당함으로써 논리학과 자연과학의 발달이 저해되었다는 저자의 통찰은 날카롭다.

중국이 곧잘 내세우는 ‘중용의 덕’ 또한 허위적임을 루쉰의 말을 인용해서 비판한다. “중국인은 권력이 있어서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어쩌지 못하는 것을 보거나 다수가 그를 보호하는 것을 보면, 잔혹하고 제멋대로 구는 폭군이 되어 일을 처리함에도 절대 중용을 지키지 않는다. ‘중용’을 보일 때는 세력을 이미 상실하고, ’중용‘을 지키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을 때이다.”

저자는 90년대 활약하던 홍콩의 민주화 인사답게 홍콩 민주화가 더딘 이유로 중국 통치 권력의 꼭두각시가 된 홍콩 입법회 의원들의 노예적 근성과 중국 당국의 철저한 정치 통제와 위장된 민주 선거제도 때문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영국 식민지 시절의 홍콩 총독도 중국 공산당의 눈치를 보느라 홍콩인에게 민주주의를 허용하지 않았지만, 현재 중국 공산당 행정장관 치하에서는 아예 자주권이 상실되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홍콩의 입법회 의원들의 민주적 분투를 촉구하지만, 메아리가 없을 듯하다.

한편 저자는 타이완을 “가장 건전하고 귀하며 사라져가는 중국인 사회라는 원형을 지니고 있어 보호받아야 할 곳”이라고 강조하면서, 티베트와 위구르를 강제 점유하고 있는 중국의 무자비한 패권주의를 비판한다. 일본의 대륙 침략과 식민통치 등 타 국가의 중국 영토에 대한 침략에 대해서는 극심한 민족주의적 배타성을 보이면서 정작 대륙 내 타 민족의 영토를 합병하고 식민통치하고 있는 자신의 제국적 행태는 숨기려는 청조와 중국공산당의 이중적 잣대를 질타하는 것이다. 변방 이민족에 대한 중국의 잔혹한 악행과 패권주의에 대해 다양한 이해관계 때문에 침묵하고 있는 국제사회의 무관심도 함께 지적하는 대목에서는 우리로서도 뜨끔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의 비판과 풍자의 칼날은 직설적이고 매섭다. 다양한 문헌과 체험적 관찰을 근거로 수천 년 동안 이어온 적폐와 현실의 문제점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그 많은 악폐의 근원에 중국 공산당과 유가 사상의 일면이 자리하고 있음을 폭로하는 대목에 중국 당국이 더욱 당황스러워할 만도 하다. 저자는 20세기 초 중국인의 나태한 정신을 일깨운 루쉰과 386세대의 정신적 스승으로 80년대에 중국의 전통문화에 내재된 열악한 근성을 공격한 보양의 대를 잇는 문화비평가로 평가받을 만하다.

저자의 중국인, 중국 사회에 대한 혹독한 자아비판은 중국의 위신을 해치는 무분별한 자해행위로 규탄도 받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에게 중국인의 나쁜 민족성과 중국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와 결별을 촉구하는 성찰의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 책이 중국에서 받은 환호 못지않게, 한국에서 주목받고 널리 읽힌 것도 그만큼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던 ‘가깝고 먼 이웃’ 중국인의 내면의 모습과 중국 사회의 추악한 모습을 저자가 숨김없이 드러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저자의 독설과 양심선언이 자해용이 아님은 분명하다. 반체제 민주화 운동으로 18년간 옥고를 치르고, 미국을 거쳐 현재 노르웨이에 거주하고 있는 저자가 마지막 장에서 북유럽이 사회민주주의를 통해 국민의 복지와 민주주의를 모범적으로 구현해 나가는 있는 모습을 자세히 전달해 주고 있는 것을 보면, 중국처럼 허위적이지 않게 이상과 현실을 일치시켜가는 있는 북유럽을 중국이 지향해야 할 국가 모형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저자의 대안적 제시 속에 중국에 대한 속 깊은 애정이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