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책제안서(1)
수신: 국회 여당, 야당, 전국대학, 각 방송사, 신문사
제목: 역사교과서 국정과 검인정에 대한 제안
1) 제안
① 대대적인 한국사 재검토 요청
② 각 방송 및 영화사는 사극물(史劇物) 제작 및 방영금지 요청
필자가 보기에는 국정을 주장하는 측이나 반대하는 측 모두 다 가짜들이다. 따라서 국정에 대한 문제를 찬성이나 반대 보다는 일단 보류해주기를 제안한다. 그리고 다음 사항들을 참고해서 역사문제를 재검토해서 차후에 결정했으면 좋겠다.
2) 한국사의 정황
필자가 평생을 역사공부한 결과를 얻었는데
1. 중국은 섬서성과 산서성의 경계를 이루는 중앙 황하를 경계로 그 서쪽의 역사를 모두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래서 고 조선부터 청나라까지 역사무대가 모두 중국의 산서성, 하북성, 요서지방으로 나타난다. 누가 연구하더라도 비슷하다.
2. 이 동쪽으로 옮겨 놓은 역사를 일제가 현재의 신만주와 한반도에 이동시켜서 덮어놓은 것이 현재의 한국사다.
3. 현재 중국, 한국, 일본의 역사책들은 모두 현재의 한국사에 맞추어서 조작된 소설이다.
4. 이런 상황은 한국과 중국이 금서(禁書)로 취급하는 조선의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중국의 지명 족보인 중국고금지명대사전(1931, 1932년판)을 공부해보면 나타난다. 금서란 그 역사의 실체를 숨기기 위한 책이다. 이 책들 속에는 이동되고 조작된 역사의 원래위치를 알 수 있는 기록들이 있는데 한국학자들은 이런 책으로 공부한 사람이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일제가 우수한 한국인에게 사대사상과 식민사상을 세뇌시켜 한반도와 만주를 영구지배하기 위해 과거의 찬란한 문명의 역사를 말살하고 일본 섬의 위치에 맞게 역사를 조작하여 한국사로 했는데 지난 70년 동안 무슨 이유인지를 모르겠으나 강철같이 일본의 식민정신을 국민들에게 주입시켜왔다.
5. 역사는 패권자의 입맛에 맞는 정치적 역사와 진실역사가 있다. 그런데 패권시대에는 거의가 패권자의 정치목적에 따라 하기 때문에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민족자립의 역사를 해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전혀 개선의 여지가 없었다.
6. 이에 이번 기회에 우리역사를 전면적으로 검토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21세기는 단순한 환절기가 아니고 패권시대가 가고 정신문명시대로 전환되는 우주에너지 교차시대다. 따라서 진실이란 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므로 인류가 조금씩 정신도덕과 진실 쪽으로 가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시간이 갈수록 과거의 모든 것들이 하나씩 드러나서 바로잡히게 된다. 권력과 힘으로 억압하고 강제해도 머지않아 무너질 수밖에 없다. 개미에 불과한 인간들이 어찌 우주에너지를(하늘을) 이길 수 있는가?
7. 민족의 발전과 도약은 정치나 학문보다는 의식개혁이 절대적인 선행조건이다. 따라서 한국인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모든 국민이 의식개혁에 동참하여 미래를 선진적으로 대응하여 정신문명시대에는 최강의 정신주도국으로 부상할 수 있게 이끌어주고, 힘을 모아주었으면 좋겠다.
3) 고구려 성들의 위치
필자가 수나라, 당나라가 요동에 있는 고구려를 침략한 전쟁터를 연구해보니 모두 중국 서쪽의 감숙성이다. 한반도 평양과는 무려 7천여리나 떨어진 중국의 역사다. 그래서 간단하게 확인시켜 주기위해서 고구려 성(城)이 감숙성에 있다고 직접 기록된 부분과, 고구려 국내성이라고 가르쳐온 신만주 집안이 일제 때 산서성에서 작명하여 이동시킨 증거만 제시하겠으니 나머지는 학자나 국회의원들이 적극적인 연구를 해서 조치해 주기 바란다.
3)-1. 고구려 비사성(卑奢城, 사비성)(중국고금지명대사전P. 431)
“지금 봉천 해성현이다. 일명 비사성, 혹은 비사성이라고 한다. 수나라 래호아나 당나라 장량, 정명진이 항상 해도로 출격했는데 고구려에게 패했다. (在今奉天海城縣. 一作卑沙城, 卑奢城. 隋來護兒. 唐張亮, 程名振皆嘗出海道敗高麗於此)”
① 해성현(海城縣)(P.725)
“주나라, 진나라 때 조선 땅이다. 한나라 현토소속인데 후에 낙랑에 소속되었다. 동한 때 도위를 옥저 땅에 봉했다. 위나라 평주소속이다. 진나라와 수나라 때는 고구려 소속이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평정하고 개주소속으로 했다. 발해의 남해부다. 요나라가 해주남해군을 설치했다. 금나라가 징주로 고쳤다. 원나라 요양로 소속이다. 명나라가 해주위를 설치했는데 요동도지휘사사 직할이다. 청나라 순치 간에 해성현을 설치하고 요양부 소속으로 했다. 후에 봉천부 소속으로 고쳤다. 중화민국은 그대로 했는데 봉천성 요심도 소속이다. 남만주 철로가 지나간다.
⊙ 청나라가 설치했는데 해원현조에 상세하다. (周秦屬朝鮮. 漢屬玄菟後改屬樂浪. 東漢置都尉以封沃沮魏屬平州, 晉及隋屬高句麗. 唐平高麗屬蓋州, 入渤海爲南海府. 遼置海州南海軍. 金改澄州. 元屬遼陽路, 明置海州衛. 隸遼東都指揮使司. 淸順治間置海城縣屬遼陽府. 尋改屬奉天府. 民國因之屬奉天遼瀋道. 南蠻鐵路經之. ⊙淸置. 詳海原縣條.)”
✳ 고구려 비사성을 당나라가 개주소속으로 했고 청나라가 해성현으로 고쳤으며 후에 중화민국이 해원으로 고쳤는데 지금지도에서 감숙성 해원이다.
※ 명나라가 요동도지휘사사를 설치했으니 요동 땅임을 증명하며 명나라가 요동의 서쪽인 청해성의 나라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② 해원현(海原縣)(P.723)
“청나라 평량부 염다동지가 있는 곳이다. 후에 다시 동지를 두었다. 다시 해성현을 설치했는데 고원 직할주 소속이다. 중화민국이 해원으로 고쳤는데 현에 해도원이 있어서 이름이 되었다. 감숙성 경원도 소속이다. (淸平涼府鹽茶同知所駐. 後栽同知. 改置海城縣屬固原直隸州. 民國改爲海原. 縣有海都原. 故名. 屬甘肅涇原道.)”
✳ 감숙성 고원직할주 소속 현인데 지금 고원의 서북쪽에 있다.
※ 고구려 비사성(사비성)은 감숙성 해원(해성)이다.
3)-2. 고구려 개모성(蓋牟城)(P.1128)
“본래 한나라 개마현인데 후에 고구려로 들어갔다. 금나라가 봉천부 개평현으로 했다. (요사지리지)에 ⌜당태종과 이세적이 만나 개모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발해가 개주로 했다가 진주로 고쳤다.⌟ 통지에는 이적이 점령하고 나서 이를 개주로 했다.(本漢西蓋馬縣. 後入高句麗 金爲奉天蓋平縣. (遼史地理志)⌜唐太宗會李世勣攻破蓋牟城. 渤海改爲蓋州又改辰州⌟ 通志作李勣拔之以爲蓋州.)”
① 개평현(蓋平縣)(P.1127)
“주나라 때 조선소속이다. 진나라 때 연나라 사람 위만이 점거한 곳이다. 한나라 현토소속, 당나라 개주, 요나라 진주, 금나라 개주봉국군, 원나라 개주로, 명나라 개주위인데 요동도지휘사사 소속이다. 청나라 개평현인데 봉천부 소속이다. 중화민국 때는 그대로 했다. 원래의 소속은 봉천 요심도다. (周屬朝鮮, 秦時爲燕人衛滿所據. 漢屬元菟. 魏屬平州. 晉隋屬高句麗. 爲蓋牟城地. 唐蓋州. 遼辰州. 金爲蓋州奉軍. 元蓋州路. 明蓋州衛. 屬遼東都指揮使司. 淸蓋平縣.屬奉天府. 民國因之. 原屬奉天遼瀋道.)”
② 개주(蓋州)
“당나라가 기미주를 설치했다. 지금은 없는데 당시에는 감숙성 구녕하부 경계에 있었다. (唐置羈糜州. 今闕. 當在甘肅舊寧夏府境)”
③ 경원도(涇原道.)(P.728)
“감숙성 치소 동쪽에 있다. 청나라 평량, 경양 2부와 경주, 고원 2주 및 화평천청의 땅이다. 민국이 경원도를 설치했는데 감숙성 소속이다. 치소는 평량현이다. 분할해서 평량, 화정, 정녕, 융덕, 장랑, 경양, 녕, 정녕, 합수, 환, 경주, 숭신, 진원, 령대, 고원, 해원, 화평 17현이다. (在甘肅省治東. 淸平涼慶陽二府. 涇州固原二州. 及化平川廳地. 民國置涇原道. 屬甘肅省. 治平涼縣. 轄平涼. 華亭. 靜寧. 隆德. 莊浪. 慶陽. 寧. 正寧. 合水. 環. 涇州. 崇信. 鎭原. 靈臺. 固原. 海原. 化平 十七縣.)”
✳ 해원, 고원, 개원(개주, 개평, 개성)이 서로 인접지역이고 개평은 고원의 동남에 있다. (지도 참조). 중화민국 (1911년이후) 초까지 감숙성이다.
3)-3. 고구려 건안성(建安城)(P.614)
“감숙성 성현북쪽에 있다. (수경주)에 ⌜건안수가 건안성 남쪽을 지나 간다⌟ 그 땅은 엣 서현의 역성이다. 후에 건안으로 고쳤다. (在甘肅成縣北. (水經注)⌜建安水經建安城南⌟其地故西縣之歷城也. 後改爲建安⌟)”
① 한양군(漢陽郡)(P.1104)
“후한이 전한의 천수군 치소를 기 땅으로 옮겼다. 옛 성이 지금 감숙성 감곡현 남쪽에 있다. 후에 (천수)군을 한양(군)으로 고쳤다. 삼국시대 위나라가 다시 천수군으로 고쳤다.
삼국시대 촉나라가 설치했다. 한양현을 보라.
후위가 설치했는데 치소가 란창현이다. 서위가 군을 장도군으로 고쳤다. 현이름은 한양이다. 수나라가 군을 폐하고 현으로 했는데 장도이다. 옛 성이 지금 감숙성 례현 동남에 있다.
후위가 설치했는데 북주가 폐했다. 옛 성이 지금 감숙성 천수현 서남에 있다. 본명을 역성이라고도 하고 건안성이라고도 한다. 수나라가 한양군을 설치했는데 당나라가 폐했다. 옛 성이 지금 감숙성 성현 북쪽에 있다. (後漢移前漢天水郡治冀. 故城在今甘肅甘谷縣南. 尋改郡爲漢陽. 口三國魏復曰天水. 三國蜀置. 見漢陽縣條. 口後魏置. 治蘭倉縣. 西魏改郡曰長道. 縣曰漢陽. 隋罷郡改縣曰長道. 故城在今甘肅禮縣東南. 口後魏置. 北周廢. 故城在今甘肅天水縣西南. 本名歷城. 又名建安城. 隋置漢陽郡. 唐廢. 故城在今甘肅成縣北)
✳ 한양군 치소를 후한의 천수군 서남의 기 땅일 때 감곡현 남쪽이고 성현북쪽이다. 한양군 치소를 서위가 성현으로 옮겼을 때가 례현 동남이다.
✳ 건안성은 감숙성 천수서남 冀, 冀城, 歷城, 漢陽郡 소속으로서 주황산(朱皇山)지역이다.
이상의 비사성, 개모성, 건안성이 감숙성에 있는데 다른 성들도 모두 주변지역에 있는 감숙성이다.
4) 신만주 통구, 환인, 집안의 발생과 이동
4)-1. 회인현(懷仁縣)(중국고금지명대사전 P.1342)
“요나라가 설치했다. 아보기가 진왕 이극용과 동성에서 회합했다. 회상인이란 사람이 있다고 해서 현의 이름으로 택했다. 지금의 산서성 회인현 서쪽이다. 금나라 때 지금의 치소로 옮겼다. 명나라, 청나라 때는 다 산서성 대동부 소속이었다. 민국 초에는 산서성 안문도에 속했다”(중화민국 1911-1928년)
4)-2. 집안현(輯安縣)(P.1244)
“한나라 말기에 고구려 환도현이다. 당나라 때 발해의 서경압록부다. (감숙성) 청나라가 통화, 회인 두현을 설치한 땅이다(산서성). 광서간(1875-1908년)에 나누어서 집안현을 설치했다. 치소는 통구구이고 봉천성소속이다. 중화민국 초에는 봉천 동변도인데 지금의 요녕성이다. (漢末高麗丸都縣. 唐渤海西京鴨綠府. 淸爲通化懷仁兩縣地. 光緖間析置輯安縣. 治通溝口屬奉天興京府. 民國初屬奉天東邊道. 金屬遼寧省.)
⦿ “지금”이란 1911년∼1928년 사이를 말한다. 그러므로 집안현은 1911년 이후에 현재의 만주에 설치되었다는 증거이다. (교과서: 집안을 2000년 전의 고구려 국내성이라고 학생에게 가르쳤음)
4)-3. 환인(桓仁)(P.715)
“수암주 동변지, 청광서간 회인현을 나누어 설치했다. 치소는 육도하(六道河)인데 봉천 흥경부 소속이다. 민국 때 환인으로 개명했다. 옛날의 발해 환주이고 봉천동변도 소속이다. (原爲岫巖州東邊地. 淸光緖間析置懷仁縣. 治六道河. 屬奉天興京府. 民國改名桓仁. 以古爲渤海桓州. 故名. 屬奉天東邊道.)”
✳산서성 북부 수암주에 회인현, 통화현, 집안현을 설치한 것은 청나라 광서제 (1875-1908년) 때이며, 회인현을 환인현으로 바꾼 것은 중화민국 때(1911-1928년)이다. 그러므로 산서성에서 현재의 신만주로 이동 조작한 것은 중화민국 즉 일제 때이다.
5) 한국인들이 모르는 동북아역사의 핵탄두
古조선부터 청나라까지 다 있었던 곳은 원래의 길림 땅, 원래의 만주 땅(구만주)이다. 현재 한반도 북쪽은 1932년에 일제가 만든 새로운 신만주(新滿洲)다. 신만주에는 고 조선부터 청나라까지 존재한 사실이 없고 신만주와 한반도 토박이 역사는 일본이 깡그리 말살하여 기록사가 없다. 그런데 한국에 역가사가 있다구요 소설이지요. 혹시 현대사에 정답이 있을지 모르겠다. (유우찬의 “수, 당의 고구려침략사검토서” 참고: 시중에 없음)
2015. 9. 23.
한국상고사연구회 회장 유 우 찬
메일: hanbark33@hanmail.net
역사정책제안서(2)
2015년 10월 5일 9시 연합뉴스에서 “국민연금 일본전범기업에 투자”라는 뉴스를 보았다.
한국은 오랜 세월 일본의 만행을 규탄해왔고, 친일자들의 명부를 만들고, 재산을 회수하고, 일본의 침략만행과 위안부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지만 일본은 꿈적도 하지 않고 전쟁할 수 있는 국가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일본의 작태를 모르는 사람들이 없다. 그런데 유독 정부와 역사학계는 철저하게 일본의 하수인 노릇을 하여 왔고, 국정운영의 한 축을 담당하는 국회도 나몰라라 했다. 모두 한통속이고 짜고 치는 고스톱 같다. 그런데 국민연금이 일본의 전범기업에 투자를 해서 더러운 돈으로 국민의 생계를 꾸려가게 하겠다는 것은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친일파들의 소행이라고 의심받을 수 있다. 이렇게 한국인들의 상류지식층은 썩은 독버섯이 되어있고 민족의 암적 존재가 되어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우리도 깨어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내년부터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추지 못한 후보는 정치 9단이라도 뽑지 말자는 캠페인을 벌리자!
가) 제안 및 요청내용
1. 정부와 국회에서 정식으로 특별연구팀을 만들어 한국사 전체를 재검토할 것.
2. 각 신문사와 방송사는 고구려, 신라, 백제에 관한 어떠한 보도나 영상물을 제작하지 말 것.
3. 70년 동안 철저하게 일제의 식민사상을 국민에게 세뇌시켜 국민을 멍청한 돌대가리로 만든 정부와 국회는 이제 국민에게 합당한 해명을 해야 한다.
나) 제안이유
중국은 본토의 서쪽 역사무대를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원래 동쪽에 중국의 나라들이 있었다면 구태여 서쪽의 나라들을 동쪽으로 이동시켜서 토박이 역사를 말살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중국 동쪽에는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가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이 다른 나라의 역사를 말살시키고 그 땅을 중국의 땅이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서쪽의 역사로 동쪽을 덮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말살된 동쪽 즉 요서∼하북∼산동 지역은 바로 한국의 고대국가인 고례 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렇게 되니 고 조선부터 청나라까지의 똑같은 역사가 중국 서쪽과 동쪽에 동시에 존재한다. 그런데 이 동쪽의 역사를 일제가 또 현재의 마드(신만주와 한반도)에 덮어놓은 것이 현재의 한국사다. 그래서 고 조선부터 청나라까지의 똑같은 역사가 중국서부, 동부, 마드(신만주, 한반도)의 3개소에 동시에 존재한다. 세상에 이런 역사가 있을 수 있는가? 소설이고 만화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중에서 하나만 진짜다.
이렇게 한국인은 속아 살면서도 속은 줄도 모르면서 사는 어처구니없는 민족, 한심한 나라의 이미지를 빨리 떨쳐내자.
왜 이승만 정부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이러한 거짓역사로 국민을 기만하고 사대식민사상을 세뇌시켜 왔는지를 국민에게 정직하게 해명해야 한다. 이제 정부관료나 국회의원들이 역사를 모른다는 핑계로 거짓 지식으로 무장한 학자들에게 미루거나 발뺌하는 것은 국가지도자의 자격이 없으므로 정부에서 직접 특별연구팀을 꾸려서 올바른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이씨조선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씨조선의 도읍이 중국 서안으로 나타나고, 중국의 지명족보인 중국지명대사전에서는 당나라와 고구려의 전쟁터가 중국 서쪽 감숙성이다.
그런데 한국은 이씨조선의 도읍이 한반도 서울이라고 하니 어찌된 일인지를 국민들에게 분명하게 설명해야 된다.
1)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기록들
① 이씨조선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제1권 서문에(P.21-28)
“사방의 복판에 처한 것을 경기라 하고, 서남은 충청, 동남은 경상, 남쪽에 치우친 것은 전라, 정동은 강원, 정서는 황해, 동북은 영안, 서북은 평안이라 하였습니다. 경(京)이 둘이요 부(府)가 넷, 대도호부가 넷, 목(牧)이 20, 도호부가44, 군이 83, 현이 173이다---양경(兩京) 8도 50권을 편찬하여 바치나이다.”(노사신, 강희맹, 서거정 등이 쓴 동국여지승람 서문)
※ 위 본문에서 “정동은 강원, 정서는 황해“라고 했는데 중국은 서쪽이 커서 황해도를 둘 수 있지만 한반도는 서울의 서쪽에 황해도를 둘만한 땅이 없어서 서북쪽에 두었으니 틀리다.
또 양경(兩京) 즉 “동서이경(東西二京)“이 나오는데 이씨조선의 교과서인 천자문에는 “동서이경(東西二京)”에 대한 설명문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도읍은 화산과 하나라 옛 땅에 있고, 동서에 두개의 서울이 있으며, (동경)뒤에는 북망산이요 남쪽은 낙수이고, (서경)위수를 끼고 경수에 의지해 있는데 궁전은 울창한 나무가 있는 반석위에 있다. (都邑華夏東西二京 背邱面洛 浮渭據涇 宮殿盤鬱)”
※ 동경은 낙양 즉 경주이고 서경은 서안(西安)이 확실하다.
②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권 경도(京都)上:P.25, 경도下. 동국여지비고 1권: P.161
“서울은 북으로 화산(華山)을 진산(鎭山)으로 삼고 동과 서는 용이 서리고 범이 쭈구리고 않은 형세요, 남쪽은 한강으로서 금대(襟帶)를 삼았으며, 멀리 왼쪽으로는 대관령을 당기고 오른쪽에는 발해를 둘렀다.”
※ 중국 서안에서 본 방향이다. 한반도에서는 오른쪽이 대관령이며, 왼쪽이 발해로 정 반대다. 북쪽으로 화산을 지고 서안 서쪽에 용산이 있고, 동쪽에 호산이이 있으며 남쪽의 위수가 이씨조선 때는 한강으로 불러졌고 “금대”로 삼았다는 것이다.
한반도 서울 북산은 북악산, 북한산이라고 하며 화산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③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한성부. 형승 조(P.253)
“북쪽으로 화산(華山)을 의지하고 남쪽으로 한강에 임하였다”
④ 신증동국여지승람 경도하 비고편: 국도(P.162)
“한양(우리나라)은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으므로 장자(長子)가 가볍게 되고, 지자(支子)가 중하게 되는 땅이다.”
※ 중국은 西高東低, 한반도는 반대로 동고서저(東高西低)이다
⑤ 신증동국여지승람제3권 한성부편, 궁실(P.287)
“온 누리 모든 제도는 주(周)나라 법칙, 강역은 옛 한(漢)나라 봉역(封域)이네”
※ 한반도는 한나라 땅이 된 일이 없다.
⑥ 신증동국여지승람제3권 한성부 산천편의 삼각산(三角山: 華山이라고도 한다.)
고려 이존오의 시에(P.255)
“세 송이의 기이한 봉우리 하늘에 닿았는데
아득한 대기에 구름연기 쌓였네
쳐다보니 날카로운 모습 장검(長劍)이 꽂혔는데 ---”
※ 서울 북한산의 삼각산에는 멀리서도 크게 보이는 커다란 장검모양의 바위가 없다.
⑦ 고려 이색의 시에(P.255)
“세 봉우리 깎아내린 것 아득한 태고적이라.
신선의 손바닥이 하늘 가르치는 그 모습 천하에 드물리 ---”
※ 서울의 삼각산에는 멀리서도 크게 보이는 신선의 손바닥모양의 큰 바위가 없다.
⑧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한성부 산천편(P.255)-서호(西湖)
서호는 도성에서 10리도 못되는데 호수남쪽에 끊어진 언덕이 있는데 형상이 큰 자라머리 같으며 혹은 잠두(蠶頭)라고 한다. 언덕뿌리가 호수가운데 뾰족하게 바늘처럼 나왔는데 형세가 높아서 호수 가운데의 형승을 모두 볼 수 있다.
※ 서울 서쪽에는 수십리나 되는 호수가 없다.
⑨ 신증동국여지승람경도상 성곽조(P.43), 경도하. 성곽조(P.166)
“경성(京城)은 태조 5년에 돌로 쌓았으며 세종 4년에 수리했다. 높이가 40자 2치(약 12미터)이다.” 궁성(宮城)은 경성 복판에 있고 둘레는 1813보(약 1269m), 높이 21척(약 7m)(경도상. 성곽: P.44)
※ 한반도 청와대가 아니다.
⑩ 신증동국여지승람제52권 평안도영유현, 사원조(P.480).
“선조 계묘년에 건축하여 현종 무신년에 와룡(臥龍)이라 사액했는데 영종(영조: 1724∼1776) 경오년에 삼충사(三忠祠: 제갈량의 시호 忠武侯)로 고쳤다”
이 기록은 1750년 전후시대까지 이씨조선이 중국에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한반도로 이주할 때 중국에 있던 이씨조선의 백성을 이주시킨 후 고종과 조선왕실을 이식시켰다는 추정이 맞을 수도 있는 기록이다. 따라서 현재의 한국인은 일본의 이식나무(移植木)인 것이다. 그래서 철저하게 일본의 식민사상을 지켜온 것으로 추정된다.
4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조선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일제 때 완전히 개작되어 지리적 위치와 거리 등은 한반도에 맞추어 개조되었지만 신만주와 한반도에 관한 역사, 인물, 문화, 신화, 전설에 이르기까지 단 한 줄의 기록도 없다.
남마드(한반도)는 제주도의 1만년 된 토기와 6000년 전의 만주의 피라밋과 한반도 토기들, 옥귀걸이, 한반도 전역에 퍼져 있는 고인돌, 8000년 전의 부산 인골과 옥제품, 창녕의 배, 울산 반구대암각화, 4000년 전 이후의 청동검, 세형동검, 특히 13000개의 실선이 있는 청동거울은 현대과학으로도 만들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유물들은 중국 문화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렇게 분명한 증거물들이 있고 또 가장 중요한 것은 토박이 언어가 세계언어의 뿌리언어로서 현세 6500년간 세계문명의 근원지이며 인류의 부모 나라인데 어째서 이씨조선의 기록에서 남마드(한반도)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한 줄도 없는가? 이렇게 훌륭한 문명문화를 왜 삼국사기로 덮어서 말살했는가?
정부와 국회 그리고 사학계는 이에 대한 대답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2015. 10. 5.
한국상고사연구회 회장 유우찬
'펌사위' 카테고리의 다른 글
宋俊熺 '일만천년 천손민족(天孫民族)의 역사' (0) | 2021.09.13 |
---|---|
多慧 吳成泳 '우리 역사를 보는 눈' (0) | 2021.09.13 |
극진가라데 창시자 배달 최영의 총재님 장남 최광범 인터뷰 (0) | 2021.08.23 |
미야모토 무사시 '五輪書' (0) | 2021.08.23 |
중국인, 스스로의 부끄러운 DNA 폭로하다. [데일리안 박경귀의 중국 톺아보기] (0) | 2021.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