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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누리 칼럼 [한겨레 신문]

뉴잭스윙 선비 2023. 9. 1. 16:05

문제는 킬러 교육이다

 

요컨대, 문제는 킬러 문항이 아니라, 킬러 교육이다. 아이들의 잠재력을 죽이고, 자존감을 죽이고, 개성을 죽이고, 시민성을 죽이는 교육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킬러 교육의 늪에서 건져내는 것 - 이것이 한국 교육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이른바 ‘킬러 문항’ 논란이 보여준 것은 대통령의 경솔한 언행과 정부 여당의 자가당착적 태도만이 아니다. 그것은 여권뿐만 아니라 야당과 시민사회를 포함하여 우리 사회 전체가 교육에 대해 얼마나 시대착오적이고 경박한 인식을 갖고 있는지, 이 사회를 지배하는 기성세대 전체가 아이들의 고통과 불행에 얼마나 무감각하고 무책임한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었다.


논란의 쟁점들을 돌아보자. 킬러 문항은 교육 당국과 사교육 시장의 ‘이권 카르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니, 사교육을 잡으려면 먼저 킬러 문항을 없애야 한다고 대통령이 지시했다. 이에 대해 야당은 주로 대통령 지시의 즉흥성과 시점 등을 들어 예상되는 입시 혼란의 문제를 제기했고, 킬러 문항 삭제 때 발생할 ‘변별력’ 저하를 우려했다. 이처럼 논쟁은 시종일관 그저 입시와 사교육이라는 기술적인 차원의 문제를 맴돌 뿐이다. 모두가 한국 교육이 지금 이 순간 우리 아이들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킬러 문항 대신 ‘준킬러 문항’을 만들어야 한다느니, 대학 서열 체제에 아이들을 꿰맞춰야 하니 변별력을 높일 새로운 ‘묘수’를 찾아야 한다느니 떠들어댄다. 선발이 교육에 우선하다니 이런 주객전도가 어디에 있는가.


진정 놀라운 것은 시험의 난이도를 둘러싸고 논쟁이 불붙었지만, 어디에서도 한국 시험제도의 ‘기형성’에 대한 비판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선진국 중에서 대학입학 시험을 ‘기계’가 채점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만 아직도 ‘정해진 정답’을 고르는 시험을 본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라면 당연히 컴퓨터가 인간보다 우수하다. 그렇다면 아이들을 ‘질 낮은 컴퓨터’로 만드는 것이 정녕 우리 교육의 목표란 말인가. 이런 시험은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더욱 어울리지 않는다.


모든 개명한 나라에서는 아이들에게 ‘지식’을 묻기보다는 ‘생각’을 묻는다. ‘이것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이것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자기 생각을 한마디도 쓰지 않고 대학에 갈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 것”이라고 독일에서 막 교육학 박사 학위를 끝내고 온 젊은 학자가 말했다. 이 나라가 아이들을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경쟁교육과 최장 시간 학습노동으로 몰아댐에도, 여태껏 학문 분야 노벨상을 받은 학자를 하나도 배출하지 못한 이유도 바로 이 무사유의 교육에 있다.


이제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육이란 무엇이고, 한국 교육의 본질적 문제는 무엇인지 캐물어야 한다. ‘킬러 문항’을 가지고 한가로이 논쟁을 벌일 때가 아니다.


교육이란 첫째, 개인의 잠재력을 ‘끌어내는’(educate) 것이며, 둘째, 인간의 존엄성(dignity)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는 것, 즉 자신의 존엄성을 자각하고 타인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셋째, 개인적 차원에서는 개성적인 인간을 기르고, 넷째, 사회적 차원에서는 성숙한 시민을 키우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 교육은 완전한 반교육이다. 첫째, 한국 교육은 개인의 잠재력에 관심이 없다. 아이들의 고유한 잠재력을 계발하기는커녕 머릿속에 죽은 지식을 처넣는 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둘째, 무한경쟁의 정글인 야만적인 교실에서 교육을 받은 이가 존엄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셋째, 학교를 마칠 때가 되면 개성이 만개한 자유인이 아니라 연탄공장에서 찍어낸 연탄처럼 아무런 개성이 없는 인간이 되어 나온다. 이마에 박힌 영어 점수, 수학 점수만이 유일한 차이의 표지이다. 넷째, 교실이라는 전쟁터를 뚫고 나온 전사들에게서 성숙한 시민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다. 승자는 미성숙하고 오만한 엘리트가 되고, 패자는 평생 굴욕감을 품고 사는 무기력한 대중이 된다.
문제는 킬러 문항이 아니라, 한국의 아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아이들”(<르 몽드>)이라는 사실이다. 문제는 변별력이 아니라, 한국의 교육이 “세계에서 가장 경쟁이 심한 교육”(KDI)이라는 사실이다. 문제는 입시 전선의 혼란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학창 시절 내내 불안과 혼돈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보낸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 아이들을 이 불행과 고통, 이 불안과 혼돈에서 구해내야 한다.


요컨대, 문제는 킬러 문항이 아니라, 킬러 교육이다. 아이들의 잠재력을 죽이고, 자존감을 죽이고, 개성을 죽이고, 시민성을 죽이는 교육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킬러 교육의 늪에서 건져내는 것 ― 이것이 한국 교육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교권을 넘어 정치적 시민권으로

 

교사의 자살과 불안은 한국 교육의 총체적 난맥상을 보여준다. 교권이 이처럼 바닥에 떨어진 근본 원인은 한국의 교사들이 정치적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직업군 중에서 정치적 권리를 제한받는 수준을 넘어서 완전히 박탈당하고 있는 직업은 교사(와 공무원)밖에 없다.

 

교육 지옥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참혹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살인적인 불볕더위 속에 모인 수만명 교사들의 절박한 심정을 알겠다. 23살, 젊은 교사의 죽음 앞에 교육자의 한 사람으로서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어떻게 학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 사건을 계기로 교육이 전국민적 관심사가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교권 붕괴다. 최근의 여론조사를 보면 붕괴의 실상은 참으로 충격적이다. 교사의 99%가 교권 침해를 경험했다고 하고, 93%가 학생 지도 중에 학대 신고를 두려워한다고 한다. 교사의 87%가 최근 1년간 사직이나 이직을 고민했다고 하고, 27%가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지금 교사들은 학부모 갑질과 악성 민원, 아동학대법 신고를 두려워하며 ‘전시 간호사 수준의 스트레스’ 속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 교사의 자살이 보여주는 것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고, 교권의 붕괴만도 아니다. 그것은 곧 교육의 죽음이다. 한국 교육이 사망했음을 알리는 부고다.
교사의 자살이 드러낸 것은 교권의 붕괴를 넘어 교육의 총체적 난맥상이다. 그렇기에 이 문제는 교사에 대한 보호 강화라는 소극적 정책이나, 학생인권조례 폐지 따위의 퇴행적 조치로 해결될 수 없다. 이제 사태의 본질을 보아야 한다. 교권 붕괴의 뿌리를 더듬어야 한다.


교권이 바닥에 떨어진 근본 원인은 무엇보다도 한국의 교사들이 정치적 시민권을 완전히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없고, 정치 활동을 할 수 없으며, 피선거권도 없는 정치적 금치산자라는 사실―이것이 핵심 문제인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민주주의는 ‘아시아 민주주의의 등불’이자, ‘세계 민주주의의 모범’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한국의 교사만은 민주주의의 변방에서 여전히 ‘정치적 천민’ 상태에 놓여 있다. 시민의 가장 중요한 기본권인 정치적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적 무권리 상태는 사회적 무기력으로 이어지고, 교육적 무력감으로 전이된다. 사실 교권의 붕괴는 지난 수십년간 교육계를 뒤덮고 있는 거대한 무력감이 불러온 필연적 결과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교사의 정치적 시민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대다수 국가에서 교사들은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서 막강한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특히 국회 내 영향력이 상당하다. 국회의원 중 교사 비중이 핀란드의 경우 20%나 된다. 독일도 15%이며 오이시디 평균은 10% 정도이다. 대체로 국가의 선진성과 교사의 대표성은 비례한다. 선진국일수록 의회에 많은 교사가 앉아 있는 것이다. 한국의 의회에 교사가 한 명도 없다는 ―과거의 교사가 2명 있을 뿐이다― 사실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왜 선진국에서는 교사가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교사는 어느 나라에서나 가장 대규모의 지식인 집단이고, 그들에게는 높은 수준의 윤리성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가치와 의미, 윤리와 도덕이 실종된 시대에 교사 집단의 지성과 윤리성은 더욱 크게 요구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교사의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이 초라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박정희 군사정권 때문이다. 1963년 박정희가 박탈해버린 교사의 정치적 시민권이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것이다. 이승만 독재의 정치적 동원으로부터 교사(와 공무원)를 보호하기 위해 1960년 민주당 정부가 만든 ‘정치적 중립 의무’ 조항을 박정희는 교사의 ‘정치적 시민권 박탈’의 빌미로 악용한 것이다. ‘중립 의무’를 내세워 ‘참여 권리’를 빼앗았다. 이후 한국의 교사들은 무려 60년 동안 ‘정치적 중립 의무’의 덫에 걸려 있다. 그 결과 그들은 세계가 경탄하는 ‘케이(K)민주주의’의 화려한 무대 뒤편에서 서성대는 마지막 정치 천민이 되었다.


교사는 국가의 보호 대상이 아니고, 정치적 금치산자도 아니다. 교사는 교육의 주체로서 국가 발전을 견인하고 사회 진보를 주도하는 지식인이다. 교사는 또한 교육개혁의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능동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제 정치적 중립 의무라는 낡은 굴레를 떨치고 나와, 성숙한 민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적 의무를 자각해야 한다. 요컨대, 교권 회복을 넘어 정치적 시민권을 복원해야 한다.


교사의 교권 회복이 교육의 무너진 육신을 추스르는 것이라면, 교사의 시민권 복원은 교육의 빼앗긴 영혼을 되찾는 것이다. 교권 회복을 넘어 시민권 회복을 이룸으로써 죽은 교육을 다시 살려내야 한다.

 

 

‘대통령적 제왕’의 시대착오적 언어

 

아렌트는 소련의 스탈린주의나 독일의 나치즘이 개인보다는 전체를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체제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테러적 지배 형태인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공포적 지배 체제인 스탈리니즘은 전체주의라는 동일한 특성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전체주의라는 말에는 이처럼 공산주의 비판과 함께 자본주의 비판이 내장되어 있다. 그러니 공산전체주의라는 말은 일종의 형용모순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제왕적 대통령제가 아니라, 대통령적 제왕제다.”


얼마 전 한 토론회에서 이 말을 듣고 나는 무릎을 쳤다. 이보다 현재 이 나라의 상황을 더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이 있겠는가.


지금 윤석열 대통령은 민주공화국의 수장이 아니라, 중세시대 절대군주처럼 행동한다. 누구도 대통령을 막을 수 없고, 어떤 기구도 대통령을 제어할 수 없다. 민주공화국의 기본원리인 삼권 분립이 이리도 허무하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검찰과 경찰, 감사원 등 사정기관을 통치의 전면에 내세웠으며, 야당이 180석으로 다수인 입법부조차 대통령의 폭주를 막아내지 못한다. 세계가 경탄하는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대통령의 허울을 쓴 제왕’에 의해 하릴없이 허물어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행태만 시대에 역행하는 ‘제왕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도 고색창연하고 시대착오적이다. 지난 8월15일 광복절 기념사를 보라.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왔다.” ‘위장’, ‘허위 선동’, ‘공작’ 등 냉전 시대의 폭력적 언어를 한 문장에 담아내는 재주도 놀랍지만,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는 ‘공산전체주의’라는 말을 ‘발명’한 데에는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다.


공산전체주의라니, 이런 말이 어디에 있는가. 윤석열 대통령의 말과 행동으로 미루어보면, ‘공산전체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대구를 이루는 개념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새로이 형성된 신냉전체제, 그러니까 한국-미국-일본과 북한-중국-러시아의 대립 구도를 염두에 두고, 전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후자는 공산전체주의 체제라고 대립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세상이다. 지금 공산주의 체제가 지구상 어디에 있는가. 중국이 과연 공산주의 체제인가. 몇해 전 베이징 대학에서 직접 경험한 일이다. 주지하다시피,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자신의 체제를 ‘중국 특색 사회주의’라고 정의한다. 당시 학술심포지엄 자리에서 중국 학자들은 이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참다못해 내가 반박했다. “대중들을 상대로 쓰는 프로파간다의 언어를 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학문에 대한 모독이다. 냉정하게 학문적 관점에서 볼 때, 중국 체제가 어떻게 ‘중국 특색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중국 특색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가.” 이 말이 끝나자 중국 학자들 사이에서 킥킥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들의 입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을 외국 학자가 대신 해준 것에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러시아는 다른가. 1990년대 초 소련이 해체될 때 공산주의 체제도 함께 붕괴했다. 당시 인민 소유 국영기업들을 민영화, 사유화하는 과정에서 주요 정보를 독점한 소련 정보기관(KGB) 요원들이 막대한 부를 쌓아 신흥 자본가로 변신했다. 이 새로운 특권계급 ‘올리가키’의 우두머리가 바로 푸틴이다.


북한도 예외가 아니다. 김정은이 소망하는 미래는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북한은 국가적 비전으로서 오래전부터 ‘베트남 모델’과 ‘중국 모델’을 연구해왔다.


이 세상 어디에도 윤석열 대통령이 말하는 공산주의는 없다. 그렇다면 ‘공산전체주의’는 존재하는가. 이것 또한 역사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전체주의’는 알다시피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고안한 개념이다. 아렌트는 소련의 스탈린주의나 독일의 나치즘이 개인보다는 전체를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체제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테러적 지배 형태인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공포적 지배체제인 스탈리니즘은 전체주의라는 동일한 특성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전체주의라는 말에는 이처럼 공산주의 비판과 함께 자본주의 비판이 내장되어 있다. 그러니 공산전체주의라는 말은 일종의 형용모순이다.


윤 대통령의 ‘아무 말 잔치’는 특히 교육자들에게는 크나큰 도전이자 시련이다. 제왕처럼 군림하는 막강한 권력자가 이처럼 말도 되지 않는 용어를 수시로 내뱉는다면, 도대체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하란 말인가.


19세기 중반 카를 마르크스는 ‘유럽에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다’라고 ‘공산당선언’에서 천명했다. 21세기에 대한민국의 제왕은 제2의 공산당선언을 설파하고 있다. 존재하지도 않는 공산주의의 유령을 다시 불러내고 있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절대권력자처럼 행세하는 대통령적 제왕의 시대착오적 언사가 총체적 난국에 빠진 나라를 더욱 깊은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다.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