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이 없으면 증명되지 않는다. 증명이 없으면 신용이 없다. 신용이 없으면 존경 받을 수 없다."
"정의 없는 힘은 무능이다. 힘없는 정의도 무능이다."
"오른손이 안되게 되면 왼손을 사용해라. 손이 안되게 되면 오른쪽 다리를 사용해라. 오른쪽 다리가 안되게 되면 왼발을 사용해라. 그것이 안되게 되면 머리를 사용해. 그런데도 안되면 저주해서라도 넘어뜨려라."
"잔을 비운다는 것 가지고는 어림없다. 잔을 깨부숴라. 잔을 비운다고 하더라도 비어있는 '그대'가 있다면 그 잔은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비어있음'이 그대를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무술에 관한 글을 이어가기 전에 내가 무도인으로서, 한 시대를 살다간 인생의 선배로서 진정으로 존경해 마지않는 대산배달 최영의 총재의 말씀 중 특히 가슴에 새기고 있는 금언으로 시작하였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내가 살면서 경험한 무술에 대한 일화를 소개할까 한다. 어린 시절부터 인연을 맺고 지금까지 춤과 노래와 함께 저의 친구가 되고 있는 무술 인생을 요약하자면 '장클로드 반 담에서 최영의 까지'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멋진 동작과 겉모습에서 내면의 성숙과 철학으로 다가가는 여정이라 부연해 본다.
시간을 거슬러 1986년 국민학교(나때는 '국민학교'라 불렀다.) 5학년 시절로 돌아간다. 내가 살던 동네 마산시 합성동에 합기도 도장이 하나 생겼다. (참 이제 마산시는 없어졌군. 지금은 창원시 마산회원구에 편제되어 있다.) 발육이 남달라 아저씨라고 불리던 연년생 남동생의 살을 빼고 감기를 달고 살며 골골했던 나의 건강을 위해 아버님께서 친히 등록해 주셨다. 몇 달 밖에 안 다녔지만 승급심사도 보았고 합기도 특유의 꺾고 넘어뜨리는 '수'도 수련하였는데 무엇보다 낙법을 익힌 것이 좋았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또래 친구가 있는데 깡마르고 작은 체구였지만 무척 날래고 능숙한 동작이 어린 나이에 보아도 내공이 무진장 있어 보였다. 그 친구도 지금은 40대일텐데 혹시 도장을 차리지 않았을까?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기억은 아픔과 함께 남아있다. 주말이었는지, 수련이 끝나고 나서였는지 비슷한 또래의 도장 아이들끼리 모여 장난도 치고 대련도 하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그 중 한 아이가 복싱 얘기를 꺼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글러브가 눈에 들어왔고, 스파링 한번 해보자는 제안을 하길래 저는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그래 한번 해보자 했고 그렇게 복싱 시합이 시작되었다. 결과는 1라운드도 채우지 못한 나의 참패였다. 장난스럽게 뻗은 나의 스트레이트를 유린하듯 그 친구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턱을 한번 맞은 나는 순간 의식이 멍해지며 가드도 제대로 올리지 못한 채 후속타를 고스란히 얼굴로, 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참으로 면이 팔리고 아프기도 한 순간이었지만 제가 맷집이 약한 사람이고 그만큼 더 공격과 방어에 조심해야겠다는 것과 특히 턱 방어의 중요성을 가르쳐 준 사건이었다.
사실 개인적인 무술 얘기를 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동생이다. 어린 날 나는(지금도 그렇긴 하다.) 공부하는 샌님이었지만 그는 덩치도 크고 성깔도 있어 교내에서 유명한 싸움꾼이었다. 지는 적이 없었고 심지어 형아들하고도 붙더군. 니 동생 싸운다고 친구가 알려주면 일단 쫓아가지만 거들어 주진 않았더랬다. 어련히 알아서 잘 이기겠지 하고… 하여간 국민학교 졸업할 때쯤 씨름부로 스카우트 되어 마산상고 상비군까지 가더군. 물론 지금은 계속하지 않지만 그의 무술은 다분히 유술을 지향하고 있다. 씨름으로 상대의 중심을 이용하는 요령을 터득하고 나서는 유도를 배워 유단자가 되었다. 그에 반해 나는 격술을 지향했다. 전편에서 말한 태권도, 프로태권도를 배우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 두 형제의 추구점을 하나로 모아지게 한 인물이 역사에 등장했다. 바로 바람의 파이터 최영의 총재님이시다. 그의 무술, 행보, 사상은 각각 서로가 경험했던 유술과 격술의 한계점을 넘은 어떤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하기에 충분했다. 사실 동생이 먼저 알고 내게 소개를 해 주었고 이내 나도 동화되었다. 우리 형제는 책으로 그분을 먼저 알현하였다. 국내에는 '실전공수도교본'으로 번역 출간된 'Essential Karate'(1979)라는 당시에도 오래되어 보였던 그 책을 함께 탐독하며 내가 육사에 들어가 성년이 된 뒤에도 우리는 자주 약식 대련을 했었다. 지금도 나의 책꽂이에 방학기 소설 '바람의 파이터' 전3권과 함께 모셔져 있다.
지지부진하던 나의 무술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영화가 한편 있었다. 장클로드 반 담 주연의 1989년작 '어벤져'이다. 원제목은 'Kickboxer'. 중학생 시절에 극장에서 본 그의 아름다운 무술 동작에 난 단번에 반해버렸다. 특히 일자로 다리를 찢는 스트레칭 동작과 이른바 헬리콥터 킥으로 불리는 뛰어 뒤돌아 차기 기술은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그를 흉내내기 위해, 그의 동작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매일매일 스트레칭의 고통을 참았고 수없이 넘어져 바닥에 찍히는 상처를 견디어 내었다. 한 달쯤 하고 나니 내 힘으로 다리를 일자로 만들 수 있었고 영화 속의 그처럼 두 의자에 양 발을 올리고 버티는 모습을 흉내 낼 수 있었다. 이렇게 관절의 폭을 넓히고 반 담 특유의 우아하고 선이 명확한 발차기 동작을 계속 연습하면서 나의 발 기술에 진일보가 있었다.
그의 무술 동작이 아름다웠던 이유는 10살 때 송도관 공수도(Shotokan Karate)에 입문한 이래 킥복싱, 태권도, 무에 타이 등을 익히는 사이 16세 무렵 발레를 5년간 배웠기 때문이다. 그는 "발레는 예술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하나의 가장 어려운 스포츠이기도 하다"고 회고했다. 장클로드 반 담(Jean-Claude Van Damme, 본명 Jean-Claude Camille François Van Varenberg)은 1960년에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나 1980년에 유럽 가라데 대회에 나가 미들급에서 우승하였고, 이듬해에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5년동안 양탄자공, 피자 배달부 등의 직업 생활을 하면서 영어를 익혔다고 한다. 캐논 픽처사와 계약을 한 이후 많은 작품에서 배우이자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출연 또는 연출한 작품은 투혼 쿵후30(Bloodsport, 1988년), 사이보그(Cyborg, 1989년), 어밴저(Kickboxer, 1989년), 이탈자(Wrong Bet, 1990년), 지옥의 반담(Death Warrant, 1990년), 더블반담(Double Impact, 1991년), 유니버설 솔져(Universal Soldier, 1992년), 탈주자(Nowhere To Run, 1993년), 하드타겟(Hard Target, 1993년), 타임캅(Timecop, 1994년), 서든데스(Sudden Death, 1995년), 퀘스트(The Quest, 1996년), 맥시멈 리스크(Maximum Risk, 1996년), 더블 팀(Double Team, 1997년), 리젼에어(The Legionnaire, 1998년), 유니버설 솔져: 두 번째 임무(Universal Soldier: The Return, 1999년), 스트리트 파이터, JCVD(JCVD, 2008년), 유니버설 솔져: 재생(Universal Soldier: Regeneration, 2009년) 등이 있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니 3개 빼놓고는 다 본 것 같다.
이번에는 사관생도 시절의 일화다. 내가 수학하던 시절에는 육사를 졸업하기 위해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KPI가 있었다. 학과성적에 낙제가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된다, 군사훈련을 모두 수료해야 한다, 무도는 유도, 태권도, 검도 중 택일하여 2단 이상 따야 한다, 수영은 평영으로 200미터를 갈 수 있어야 한다 등이 그것인데 그렇다 보니 생도들은 누구나 학과 후에 각각 무술수업을 듣기 위해 체육관으로 달려간다. 나는 태권도를 선택했고 수업이 있는 서애관이 제2의 교실이었다. 전반적인 수업은 육사 출신 선배 장교 교관께서 주관하셨고 때때로 초빙강사가 오기도 했다. 서애관에 들어가면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쓰여진 '국기태권도' 현판이 결려 있었고, 승단심사 때는 국기원에서 직접 나오셔서 수고해 주시기도 했다. 이즈음 '서태지'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는데 서애관 태권도 지도생도를 일컫는 말이었다.
승단심사를 앞둔 어느 수업시간이었을 거다. 품세 연습 후 겨루기 연습 시간에 공수도 기술을 쓰는 동기가 있었다. 상대의 찬 다리를 잡고 받치고 있는 다른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거나 하단 차기를 하는 등 별도로 배운 공수도 기술을 태권도 수업 시간에 쓰고 있더군. 그런데 그 동기의 표정은 아차 실수했구나가 아니라 내가 더 잘하고 이겼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종격투기도 아니고 태권도 시간에 타류를 굳이 과시했어야 했나 싶었고, 순간 내가 독학하고 있던 극진 공수도로 결투 신청을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친구의 공수도는 극진이 아닌 타류였기에 더욱 전의가 타 올랐지만 참았다.
그 때는 정말 나의 신체적 역량이 최고조였을 때였다. 20대 초반의 청춘이기도 했고, 매일 오후에 운동을 하고 저녁 때는 선배들이 얼차려로 또 알아서 단련시켜 주었으며 1일주에 한번은 꼭 단체구보로 심폐지구력을 높여 주었기 때문이다. 나의 무술 기량도 그러했다. 발을 걷어차 올리는 높이나 스피드, 오랫동안 대련할 수 있는 체력까지… 어느 오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애관에서 발차기 수련을 하고 있는데 나의 몸놀림을 보시고서는 교관 중 한 분께서 중령이신 책임교관께 "이 친구가 참 성실하게 잘 합니다" 라고 인사를 시켜 준 적이 있었다. 이후에 이어진 품세 수업에서 제 동작을 보시고는 탁월하고 열심히 해 주어 고맙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당시에는 어렸고 시야가 좁았기 때문에 몰랐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중요한 기로였지 않았나 생각한다. 장교 임관 후 일선 부대의 지휘관이 되는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학과 교수나 체육 교관이 되는 사례도 많이 있었고 무도 교관도 기회가 있었더랬다. 내가 좋아하고 잘한다는 소리를 듣던 태권도를 3단, 4단 또는 그 이상까지 따고 관련 교관님들과 상담을 하거나 인맥을 만들었더라면 또 다른 인생이 펼쳐지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 본다.
추억 속의 내 모습에서 훌쩍 20여년이 흘러 사회인으로서의 저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가족과 아이가 있어서라는 핑계로 이제는 '생활 속의 무도인'이라는 소박한 지향점을 가지고 살고 있다. 따로 도장을 다닐만한 여건이 되질 않아 매일 스트레칭을 하고 가끔 집에서 기본 동작을 확인하는 선에서 유지하고 있다 보니 외형보다는 정신과 철학에 자연히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 다음 기회에 따로 얘기할 대산배달님의 행보, 말씀, 저서, 영상기록물 등을 통해 그분이 극진공수도의 체계와 동작 하나하나에 담으려 했던 원리와 무술을 통해 추구하셨던 세상에 대한 철학을 나름의 해석으로 더듬어 가는 과정이 무척 경건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다.
앞서 적어둔 대산배달님의 금언 중 하나를 변형하여 직장인으로서 스스로를 반추하고 긴장을 늦추지 않게 하는 나름의 신조가 있는데, 바로 "프로는 산출물로 말한다" 이다. '프로'와 '산출물'은 각각의 단어가 다양한 상황에서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쳐 저의 자세와 이를 통해 추구해야 하는 가치에 대한 지침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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