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사철(文史哲)이라는 표현이 있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인 인문학을 구성하는 문학, 역사, 철학을 줄여서 일컫는 말이다. 각각의 학문으로서도 의미가 있지만 일찍이 존경해 마지 않는 도올 선생께서는 “이들 3가지 학문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한가지 학문만으로는 그 시대의 논의나 사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역설하신 바 있다. 내가 비록 동양고전에 이제 막 눈뜨기 시작한 초심자이지만 철학에 대한 관심이 역사로 이어지는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아무래도 학습의 중점이 중국의 고대철학에 맞추어져 있다 보니 세계사보다는 한국사에 쉽게 몰입되었다.
나의 한국사에 대한 관심은 한국통사나 조선왕조실록 등의 서적을 읽는 것이 아니라 수학능력시험이나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대비한 동영상 강의 과정을 수강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고교시절에 한번 배웠던 어렴풋한 기억만이 남아있는 지식을 업데이트하고 싶었고, 시험을 전제로 한 강의 컨텐츠라는 특성상 압축적이고 빠르게 전체 틀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른바 스타강사로 불리는 설민석 선생과 최태성 선생의 강의에 호감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강연과 강의는 다르다. 전자의 경우에는 본인의 감흥과 극적인 스토리를 실어 표현할 수 있지만 후자는 합격이라는 정해진 목표에 속박된다. 정해진 교과과정이 있고 수강대상이 고교생인 강의 현장에서 강사들의 감흥이 표출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2명의 강사도 역사학도였다. 빨간색, 노란색 분필로 별표 치고 판서하는 동안 초록의 칠판 사이로, 진도 빼기 바쁜 교과서의 한 대목에서 문득 눈매와 어조가 빛나는 순간이 있었다. 사학자이자 교육자이자 청년으로서의 시대정신이 그들을 역사 분야에 몸담게 하는 동력이리라.
나의 한국사 공부는 여전히 진행형이고 지식체계도 아직 영글지 않았지만 항상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는 감정이 있다. 아쉬움, 안타까움, 슬픔, 격앙됨… 뭐라 단정지을 수 없는, 이 모든 것이 뒤섞인 복잡한 그 무언가가 우리 역사의 몇몇 장면과 함께 하고 있다. 생각나는 대로 적어 두었던 메모들을 이제야 글로 옮기는 것은 올해로 98주년을 맞이한 3.1절을 대하는 나의 자세이다. 지금부터 적혀질 내용은 실존했던 역사의 한 순간을 대상으로 하되 그에 대한 판단, 접근, 관점은 온전히 사견임을 밝혀 둔다.
상당한 기간 동안 하나의 왕조를 유지했던 기록은 역사의 유구함을 증명하는 세계적인 자부심이다. 허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했는가. 나의 시선은 왕조의 마지막 시기에 머문다. 영원하리라 믿었던 왕조의 몰락에는 항상 이유가 있었다. 통일신라의 귀족사회, 고려의 무신과 권문세족, 조선의 친일세력과 시대변화에 둔감했던 관료조직. 이들의 공통점은 기득권과 부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기울였으되 백성의 안위는 배제한 그들만의 리그를 벌였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백성은 세금을 바치고 노역을 제공하며 전시에는 목숨을 거두어 갈 수 있는 자원에 지나지 않았다. 이 체제를 얼마나 유지하고 싶었으면 문자와 지식을 독점하고 신분제로 사회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채널을 차단한 채 아둔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했을까.
대략 1800년대부터 지금까지 200여년에 해당하는 근현대사는 파란만장했던 수천 년의 고대사보다 훨씬 더 격동의 세월로 조명 받는 시기이다. 이는 단순히 기록이 많이 남아있고 당대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고대부터 이어온 기득권의 가치와 민중의 꿈 간의 대립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태성 선생은 항상 그의 강의 첫머리에 근현대 시대에 대중이 꿈꿨던 것은 신분제로부터의,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독재와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인지 일방(대부분 권력을 취한 집단)의 의도에 따라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노이즈가 군데군데 끼어있다는 것을 느낀다.
먼저, 일제의 왜곡 즉, 식민사관이다. 관련 문헌을 찾아보면 보다 정확한 내용들이 있을 것인데,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 주장했고 교묘하게 교육과정에 반영하여 당시 아이들을 가르치고 민중들에게 강요한 용서할 수 없는 만행이 바로 식민사관 아닌가. 외세 침입이 많았고 중국을 사대하던 민족이고 조선은 당쟁이 심했던 나라였다고 호도하며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떨어뜨렸으며, 역사기록과 사료를 묵살하고 엄연한 국가였던 단군조선을 신화에 불과하다며 고조선과 단군조선의 역사성을 부정했다. 1급 전범인 역대 조선총독부 총독이 남긴 망언들을 보라. 우리가 더 이상 국론 분열로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조선총독부의 3대와 5대 총독으로 있었던 사이토 마코토는 3·1운동 이후 통치방식을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전환시키는데, 그가 1925년에 전국 교사들에게 시달한 교육시책에 식민사관의 파렴치한 실체가 나타나 있다.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무능과 악행을 들춰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의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 그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籍)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때에 일본 사적,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同化)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실제로 일본은 한일합방 직후부터 전국에서 수집된 한국의 순수역사자료 50여종 20만 권을 압수하여 불태우고 중요 사료는 일본의 황실도서관 및 동경대학교 지하 비밀 서고에 보관하였다.
조선총독부 마지막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현 일본 총리인 아베 신조와 같은 집안이다. 위안부나 독도 문제에 대해 아베 총리가 지금과 같은 태도를 취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는 뼛속까지 전범의 후예이다.)는 일본의 패망 소식을 접하고 할복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돌아 가면서 저주와도 같은 망언을 내 뱉었다. “우리는 비록 전쟁에 패했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조선인이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다. 조선은 결국 식민지교육의 노예로 전락하였다. 조선인들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그는 해방 후에도 조선은 아직도 자신을 다스릴 능력이 없기 때문에 독립된 정부형태가 되면 당파싸움으로 다시 붕괴될 것이라며 남북공동정부 수립을 적극 반대한 것으로 드러났다.
다음은 제도권 교육의 대명사 국정교과서다. 특히 70-80년대 국사 교과서는 정부수립 세력과 산업화 세력의 국정홍보의 장이자 식민사관의 잔재로 얼룩진 슬픈 기록이다. 자료에 대한 해석이 아직 진행되지 않은 부분도 있었고, 당시에는 사료가 발견되지 않아 잘못 정리된 대목도 다수 있었던 참으로 무지했던 현실이었다. 그 시절 역사 교육은 또 어떠했나. 인터넷이 없었고 매체가 제한적이었기에 당시 사학계를 지배하고 있던 주류만 알려지고 학습되었지 새롭게 진행된 연구에 의해 밝혀진 역사적 결과물은 소수의견으로서 비주류의 자리를 지켜야 했다. 학교 현장에서는 그저 입시를 위해 암기하는 주입식 교육 그 자체 아니었는가.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그 결과는 후대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우리는 무엇을 깨닫고 미래를 만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논의와 가치관 정립은 사치이지 않았는가. 나 또한 제도권 교육의 틀 속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중년의 사회인이 된 지금이라도 자각하고, 진실을 알고, 시대정신을 갖게 된 것은 다행스럽기도 하고 너무 늦은 것이 아닌가 부끄럽기도 하다.
영화나 음악, 소설 같은 예술도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데 한몫을 하고 있다. 명성황후를 보자. 멋지게 연출된 뮤직비디오 속에서, 유명한 소프라노 가수의 음악 속에서, 훌륭한 무대 위의 뮤지컬 속에서 그녀는 조선의 국모이자 애틋한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작가적인 허구와 상상력이 버무려진 예술 작품에서 극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무어 그리 나쁜 일이겠냐 마는 그 창작물이 그녀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가리는 것이 문제이다. 그녀를 민비라고 부르면 이른바 난리가 난다. 민비라는 표현이 그리 낮추어 부르는 의미가 아님에도 꼭 명성황후라고 칭해야 한다.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인가. 다른 것은 다 접어두고라도 흥선대원군과의 대립각으로 고종이 친정선언을 하게하여 구한말을 민씨 일가의 매관매직으로 얼룩지게 한 원인자가 그녀요, 신식군대인 별기군에 대한 과도한 우대로 임오군란을 야기한 것도 모자라 이를 진압한다고 청군을 끌어들인 것도 그녀와 그의 친척들이다. 그때 처음으로 외세가 서울 한복판에 주둔하게 되니 그곳이 바로 용산이다. 이후에도 위정자들은 그곳을 일본에 그리고 미국에 내어 주었으니 참으로 슬픈 우리 역사의 자화상이 아닌가.
소설로 최근에 주목 받은 이가 있었으니 바로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다. 한 개인의 일생으로 보면 일체침탈의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생을 보낸 분이다. 힘없는 어린 나이에 강제로 일본 유학 길에 올라 38년만에 그리운 조국땅을 다시 밟은 것이 그녀의 나이 50세의 일이다. 그나마도 15년 가까이를 정신병원에서 보냈고 77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도 조현병으로 정신이 온전했던 날이 드물었다고 한다. 이렇듯 스러져가던 조선의 마지막 모습을 여실히 대변하던 그녀지만 최근 상영된 동명의 영화에서는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일본으로 강제 징용된 조선의 근로자들 앞에서 자주성과 희망을 연설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작가적 의도로 연출된 그야말로 극적인 장면들이지만 이 또한 마치 당시 황실은 한일합방을 거부했고 독립운동을 추진한 것처럼 오해하게 한다. 마치 황실을 미화해야 하는 사명을 받은 듯이 보일 정도다.
쭉 나열하면 한 페이지를 거뜬히 채울 만큼 무슨 무슨 조약으로 나라를 도륙 당하면서도 경술국치 당시 일본과 맺은 한일병합조약을 통해 조선황실과 왕족은 지위를 보장 받는다. 7개 조문 중 3가지가 이에 대한 내용으로 작성되었는데 무슨 더 할말이 있겠는가. 이 늑약은 이완용 등의 매국노들에 의해 체결된 것이지만 당시의 반일, 반정부 감정을 개인으로 돌리고 친일세력 전체가 그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한 역사적 대상물으로 이용한 점도 인식해야 한다. 합방 후 일제는 조선 황실을 “이왕가(李王家)”로 부르며 왕족 대우를 해주었으며, 천황가 다음으로 많은 세비를 주었다. 글로 옮기기에도 치욕스런 3개 조문은 다음과 같다.
제3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들의 황후, 황비 및 후손들로 하여금 각기 지위를 응하여 적당한 존칭, 위신과 명예를 누리게 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데 충분한 세비를 공급함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 조항 이외에 한국 황족 및 후손에 대해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누리게 하고, 또 이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자금을 공여함을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공로가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별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는 동시에 은금(恩金)을 준다.
다시 명성황후를 본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녀의 사망 전후의 전개이다. 시해 후 일본 자객들은왜 그리도 급히 시신을 불태웠으며 그녀의 사진자료는 지금도 명확한 것이 없을까? (그의 부군인 고종도 그녀 사후에 초상이나 사진이 없어 안타까워했다는 일화도 있다) 마치 그녀의 얼굴을 몰라야 하는 것처럼. 120여년 전의 시해사건과 세월호 참사가 묘하게 겹쳐진다. 수백 명 학생들의 목숨을 앗아간 있어서는 안될 비극 앞에 국정의 무능을 탓하는 원성이 높아질 즈음 사고의 원인으로 청해진 해운의 유병언 회장이 지목되고 공분의 관심이 그에게 쏠리게 된다. 이윽고 나타난 그의 시신. 신원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패되다 못해 백골이 된 채 나타난 그의 죽음을 통해 지탄 받던 정부는 면죄부를 받기를 원했다. 외세 간섭에 무능했던 왕실과 증세를 거듭하며 자신들의 배만 불린 민씨 일가에 대한 격렬한 반기였던 동학농민운동, 궁 호위병까지 살해하고 침입한 잔혹한 무리들인 일본 낭인들에 의한 암살, 끔찍한 수치를 당하며 사망한 후 불태워진 그녀의 시신. 몇 가지만 치환했을 뿐인데 두 사건은 닮아 있다. 명성황후가 러시아로 건너가 지내다가 사망했다는 의견도 실제로 존재한다. 과연 지나친 음모론적 접근이라 단정지을 수 있으랴.
근현대사를 다시금 바라보건대 우리역사를 바로 세울 결정적인 순간들이 있었다. 이것도 전적으로 사견이다. 첫째는 개화기이다. 모두가 잘 알듯이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하였다. 이는 동양사상의 퇴조를 의미한다. 이 패전으로 인해 중국은 새로운 사상적 근간이 필요했고 결국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받아들여 공산사회가 된다. 시대의 흐름은 우리나라도 비껴가지 않았다. 서학이라 불렀던 천주교를 발전적으로 해석하고 수용하는 대신 정부는 이를 박해했다. 이후 민중 속에서 일어난 동학은 단순히 서학에 반대되는 개념이 아닌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담은 인권 선언이었으며, 신분제 폐지의 출발점이 된 근대정신의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당시 국가는 이 같은 세계사적인 가치를 담을 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다.
동학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하나는 동경대전을 포함한 천도교 경전이다. 또 하나는 정부의 동학군진압 보고서이다. 1차, 2차에 걸친 진압기록이 여러 문서를 통해 남아 있는데, 어디서 누굴 체포했는지 어떻게 진압했는지 상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무엇이 그리도 자랑스럽고 뿌듯한지 마치 공적서를 연상시키는 대목도 있었다. 그나마도 청군과 왜군의 힘을 빌었으면서… 민중의 자발성으로 만들어진, 민족 고유의 사상에 근간을 둔 근대철학으로 시대의 변곡점 속에서 정체성을 이어갈 수 있었던 중대한 기회였다는 것도 몰랐으면서…
둘째는 정부수립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광복군의 항일전쟁을 통해 독립을 한 것이 아니라 미군의 히로시마 원폭으로 인한 종전을 통해 해방된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친일청산의 기회를 갖지 못했고, 남북 분단국이 되었으며, 항일독립 활동가의 후예가 지금까지도 홀대 받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 주재 OSS(미국 육군정보전략본부)와 공동으로 국내 진공 계획인 “독수리 작전”이 준비 중이었으며, 치밀한 전략 하에 강도 높은 훈련을 거쳐 1945년 8월 4일 요원 1기생 38명이 배출되어 본격적인 작전 수행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해방에 작전은 취소될 수 밖에 없었고, 쓸쓸하게 배를 타고 귀국한 직후 광복군은 무장을 해제 당해야만 했다. 김구 선생은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준비한 것이 다 허사가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국내에서 활동이 어려워진 항일투쟁의 주 근거지는 만주지역이었고, 난징대학살 등으로 반일감정이 격해진 중국은 우리의 체계적이고 군사적인 항일활동을 지원하였으며, 일제 치하의 기존 체제에 대항하여 반일 지식인들이 받아들인 사상 중에는 사회주의도 포함되어 있었다. 반면, 광복과 함께 그 동안 누리던 모든 것을 잃게 된 친일세력은 반공, 친미의 이분법으로 국면을 전환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였고 반공이라는 미명 하에 지독한 학살을 자행함을 통해 그들의 친일 행각을 알고 있는 위협요소들을 모두 공산당으로 몰아 자신들의 생명을 연장했다. 당시는 미국이 한국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없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승만 등의 소수 유학파들이 운신할 수 있는 환경이 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초기부터 형성된 양분구도는 작금의 시기에도 여전히 남아 좌익, 종북 등으로 그들이 필요할 때마다 활용되고 있다.
셋째는 민주화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각 정권 마다 선거, 유신, 독재 등에 항거하는 학생운동과 민주항쟁이 이어졌다. 이들의 희생으로 어렵사리 정권의 교체가 있었고 김대중에서 노무현으로 정권이 이양될 때는 헌정 역사상 가장 민주주의적이었다고 자평할 만했다. 그러나 참여정부 출범 직후부터 줄기차게 이어진 조중동의 언론공격과 기득권의 전방위적인 압박, 국민이 깨어나길 바라며 참여의 문을 열었지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던 대중의 현실 앞에 채 만개하지 못한 꽃잎은 떨어지고야 말았다.
국민의 합의에 의해 창출되지 않은 권력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현실을 왜곡하고, 대립구도를 만들어 활용하고, 반대세력을 억눌러야만 하는 것인가.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국정원 대선 및 총선 개입, 민간인 간첩조작, 천안함 사건, 세월호 참사에서 국정농단까지 일련의 사태는 그들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짓까지 할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모두 심각한 범죄행위가 결부되어 있었고 상당 부분 의혹이 제기되고 밝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발본색원할 수 있는, 적어도 확인은 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신해철의 장례식에 모인 동료 가수들. 그 자리에서 추도사를 낭독한 사람이 서태지였다는 것은 그가 단순히 망자의 친척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음악적 교류는 물론이요 방송계의 불합리에 저항하며 사회에 대한 시대정신을 노래했던 예술가가 아니었던가. 장례식 이후 다시 모인 동료 음악인들은 고인의 사망에 의혹을 제기하며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대중음악을 사랑하는 “댄서의 순정”의 눈에 신대철, 이승철, 윤종신, 남궁연, 윤도현, 유희열 등 기자회견에 함께 자리한 그들 중 SM, JYP, YG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누구인가. 이른바 아이돌 사장님들 아닌가. 예쁜 아이들의 선정적인 몸짓으로 청소년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어린 나이에 부를 축적하는 사례를 보여주며 똑똑한 친구들 다 가수 하겠다고 꿈꾸게 만드는 것이 아이돌 산업의 어두운 단면이고 이를 통해 3명의 사장님은 명성과 부를 얻는다. 취업난의 불만과 문제의식을 분산시키고 청년의 시대정신을 선정성과 악플로 대체하게 만드는 어쩌면 새로운 3S 정책의 선봉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날의 기자회견 자리에 없었던 것이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다.
푸근해진 3월의 햇살에 봄을 실감하지만 2017년의 봄은 여느 봄과는 다름을 느낀다. 유난히 길고도 암울한 터널과도 같았던 겨울이었다.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역사 인식에 대한 격차를 실감했고, 앞서 예를 들었던 기득권의 뿌리가 얼마나 깊게 막혀 있는지 확인했으며, 빗나간 역사의 화살을 다시 되돌리기 위해서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차갑던 겨울 공기를 데우고 터널 속의 어둠을 밝힌 촛불이 있었기에 남다른 봄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가족과 친구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간 우리네 이웃들과 민중들은 얼마나 하고픈 얘기가 많겠는가. 그 답답함과 억울함의 크기로 보자면 애초에 태극기를 흔들고도 남았을 것이지만, 어떻게 되찾은 대한민국이며 어떻게 이룩한 민주사회인지를 알기에,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극기가 어떤 의미였는지 그 묵직함과 엄중함을 알기에 모든 마음을 담아 양초에 불을 붙였을 것이다. 내 비록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광장에 나서지 못하고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이렇게 글이나 적고 있지만, 민족의 독립을 간절히 바라며 거리로 뛰쳐나왔던 3월을 맞아 서툴기 만한 이 글에 뜨거운 역사의식을 가득 담아본다.
'글사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술에 대한 일견(후편) (0) | 2021.08.23 |
---|---|
무술에 대한 일견(전편) (0) | 2021.08.23 |
'휴먼스'에 대한 단상 (0) | 2021.07.22 |
우리가 우주 다큐멘터리를 볼 때 (0) | 2021.07.22 |
댄서의 순정 30주년을 자축합니다. (0) | 2019.12.07 |